레프 톨스토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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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N.Tolstoy Prokudin-Gorsky.jpg|thumb|250px|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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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레프 톨스토이|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1828년 9월 9일- 1910년 11월 20일) 러시아 소설가이자 시인, 개혁가, 사상가이다. 러시아 문학과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톨스토이는 1828년 9월 9일에 남러시아 툴라 근처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태어 났다. 명문 백작가의 4남으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자랐다. 학력은 카잔대학교 법학과에 다니다가 중퇴했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생각을 억압하는 대학교 교육 방식에 실망을 느껴서라고 한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인 톨스토이의 주요작품으로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의 장편 소설과 《이반 일리치의 죽음》, 《바보 이반》 등의 중편 소설이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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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li> 생활이 격변할 때 자기의 행위를 돌이켜 생각해 볼 능력이 있는 인간은 진정 명상적 기분에 젖기가 쉽다. 그리고 그런 때는 거의 과거를 검토하고 미래를 설계하여 보는 것이다.</li><li> 사람이 적응하지 못할 상황이란 있을 수 없다. 특히 자기 주위의 사람들이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을 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li><li> 장엄한 노년이 있다. 추악한 노년이 있다. 불쌍한 노년이 있다. 추악하고 장엄한 노년도 있다.</li><li> 인간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일, 아니 될 수 있으면 많은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기를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다.</li><li> 사람에게 물건을 빌려 주는 일은 마치 산 아래로 물건을 집어던지는 것과 같고, 빌려 준 물건을 돌려 받는 일은 산꼭대기에 끌어 올리는 것과 같다.</li><li> 위대하고 진실한 일은 항상 소박하며 근엄하다.</li><li> 진짜 정신병자란 남의 정신착란의 징조는 보고, 자기의 그것은 못 보는 자를 말함에 틀림없다.</li><li> 인간은 나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나쁜 일을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li><li> 자기의 생활을 높여간다. 이 사실만이 남의 생활을 높이는 것이 되며 결국은 남도 자기에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자기를 높인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높이는 것이 되는 것이다.</li><li> 무엇이 좋고 무엇이 필요한가를 정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언동이 아니며, 또 진보도 아니고 자기와 자기의 마음인 것이다.</li><li> 그러한 자기란 무엇인가? 무한한 것의 일부이다.</li><li> 어떠한 일이든 거짓에 의하기보다는 진실한 것에 의하는 편이 항상 보다 직선적이며 보다 신속하게 해결된다. 그리고 남에게 하는 거짓말은 문제를 혼란시키고 해결을 멀리할 뿐이다. 그러나 진실한 체 보이며 자기에게 하는 거짓말은 그 인간의 평생을 망치게 한다.</li><li> 남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편이 더욱 나쁜 일이다. 이러한 거짓말이 특히 해로운 것은 남에게 거짓말을 하는 경우에는 남이 거짓말을 고쳐줄 수 있지마는, 자기에게 하는 경우에는 아무도 고쳐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특히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다.</li><li> 진정한 힘은 남을 정복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이겨 동물적 본능에 영혼을 지배당하지 않는 자에게 있다.</li><li> 자기를 칭찬하지 말라. 남을 꾸중하지 말라. 남을 꾸중하는 일은 항상 바르지 않다. 왜냐하면 비난받는 자의 마음속에 일어난 일, 또는 일어나고 있는 일은 결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li><li> 자아를 버린 인간은 강하다. 왜냐하면 자아가 그의 내부에 있는 하나님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자아를 내버리자마자 그의 내부에서는 이젠 그가 아니라 하나님이 활동하는 것이다.</li><li> 모든 인간의 생활에서 중요한 일은 보다 선량하고 보다 훌륭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노력이다. 하지만 이미 자신을 훌륭한 인간이라고 생각할 때 어제보다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보냐.</li><li> 자신에 만족하는 인간은 항상 남에게 불만이다. 늘 자기에게 불만인 자는 항상 남에게 만족한다.</li><li> 좋은 인간이란 자기의 죄는 언제까지나 잊지 않고 자기의 선행을 이내 잊는 자이다. 나쁜 인간이란 그 반대로 자기의 선행은 언제까지나 잊지 않고 죄는 곧 잊는 자이다.</li><li> 선량하며 총명한 인간은 자기보다 남을 더 훌륭하고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인간과 구별하기가 쉬운 것이다.</li><li> 욕을 먹든가 모함을 받으면 기뻐하라. 칭찬을 받으면 조심하라.</li><li> 남의 허위를 발견하여 그것을 추궁하는 일은 통쾌하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허위 속에 묻혀 있음을, 자기를 추궁하는 편이 몇 배나 더 통쾌하다.
</li></ul>
=== 행복한 결혼과 가정의 평안 ===
<ul><li> 여자란 남자의 사업에 있어서 커다란 장애다. 여자를 사랑하면서 무엇을 하려 함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런 지장 없이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꼭 하나 있다. 그것은 결혼이다.</li><li> 여자는 남자보다 물질적이다. 우리들 남자는 사랑으로부터 위대한 것을 만들어 내지만 여자는 늘 너무나도 현실적이다.</li><li> 온갖 여성 문제는 참된 노동의 법칙을 어긴 남자와의 사이에서만 발생했고 또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li><li> 성실한 결혼 생활을 영위함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보다 좋은 일은 아주 결혼을 하지 않는 일이다. 그럴 수 있는 인간은 좀체 없다. 그러나 그런 인간은 행복하다.</li><li> 결혼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데도 결혼을 하는 인간의 행위는 걸리지도 않고 쓰러지는 사람의 행위와 같다. 무엇에 걸려 넘어진다면 할 수 없다. 하지만 걸리지도 않는데 왜 일부러 넘어진단 말인가.</li><li> 행복한 가정은 모두가 거의 비슷한데 불행한 가정은 거의가 각각 다른 불행을 짊어지고 있다.
</li></ul>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ul><li> 자유가 없는 인간은 생명을 잃은 인간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다.</li><li> 사람들은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이 끌고 다닐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부지런히 결박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를 묶은 그 밧줄 을 아무에게나 건네주고 나서 자기들의 자유가 빼앗겼음을 알고 놀란다.</li><li> 인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아무 것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유로우며, 남의 의지 아닌 자기의 의지로써 사는 일이다.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사람은 영혼을 위해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영혼을 위해 살려면 육체의 욕망을 눌러야만 한다.</li><li> 욕망이 작으면 작을수록 인생은 행복하다. 이 말은 낡았지만 결코 모든 사람이 다 안다고는 할 수 없는 진리이다.</li><li> 평안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으면, 없어도 살 수 있는 것을 멀리하라.</li><li> 굶어 죽는 자는 거의 없다. 맛있는 것을 너무나 많이 먹고 일하지 않기 때문에 병들어 죽는 자가 훨씬 더 많다.</li><li> 먹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먹지 않으면 안 된다.</li><li> 사람이 훌륭하게 살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이성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사람이 가장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것은 이성이다. 이 이성을 담배나 술이나 아편으로 죽이는 데 쾌락을 찾고 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사람들이 나쁜 생활을 하려고 함에 있어서 이성을 죽이지 않으면 그게 나쁜 생활이라고 이성이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li><li> 한 사람의 인간이 불필요한 것을 잔뜩 안고 있다면 다른 많은 인간들이 필요한데도 부족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li><li> 육체에 꼭맞는 옷을 입기보다는 양심에 꼭맞는 옷을 입는 것이 좋은 것이다.
</li></ul>
=== 원만한 인간 관계 ===
<ul><li> 육체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영혼을 거칠게 내버려야 된다.</li><li> 인간은 자기를 높이 평가할수록 남에 대하여 미움을 가지기 쉽다. 인간은 겸허하면 겸허할수록 선량해지며 화를 내는 일도 적어진다.</li><li> 미움은 항상 무력함에서 발생한다.</li><li> 나의 주위에는 악인이 득실거린다고 당신은 말한다. 만일 당신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 자신도 굉장한 악인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li><li> 사람은 때때로 남의 결점을 파헤침으로써 자기의 존재를 돋보이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결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인간은 총명하고 선량하면 할수록 남의 좋은 점을 발견한다. 그러나 어리석고 짓궂으면 그럴수록 남의 결점을 찾는다.</li><li> 남과의 교섭이 자기에게 있어서나 남에게 있어서나 괴로운 것이 아니게 하기 위해서는, 그 인간에 대해서 사랑을 느끼지 않으면 그와는 교섭을 가지지 않을 일이다.</li><li> 조금 화가 나면 행동을 하기 전에, 혹은 말을 하기 전에 열을 세어라. 몹시 화가 났을 때는 백을 세어라. 화가 날 때마다 이 사실을 상기하면 숫자를 셀 필요조차 없어진다.</li><li> 깊은 강물은 돌을 집어던져도 흐려지지 않는다. 모욕을 받고 이내 발칵하는 인간은 강도 아닌 조그만 웅덩이에 불과하다.</li><li> 죄를 범하는 일은 인간이 하는 일이며, 자기의 죄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악마의 일이다.</li><li> 회개한다는 것은 자기의 죄를 알고 그것과 싸울 것을 각오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에 회개함이 좋다. 램프는 불이 꺼지기 전에 기름을 부어야 하는 것이다.</li><li> 믿음에 의하여, 혹은 남의 용서를 받음으로써 죄를 벗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무엇으로도 죄를 벗을 수는 없다. 다만 자기의 죄를 알고 그 죄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li><li> 자기는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자신에게 말하는 자야말로 불쌍한 자이다.</li><li>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의 죄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대신 그 죄에서 자기가 해방되어 감을 아는 일은 커다란 기쁨이다. 밤이 없다면 우리는 햇볕이 주는 기쁨을 모를 것이다. 죄가 없다면 인간은 정의의 기쁨을 모를 것이다.</li><li> 남에 대한 죄와 자기에 대한 죄가 있다. 남에 대한 죄는 남의 내부에 있는 하나님의 영혼을 존경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자기에 대한 죄는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혼을 존경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li></ul>
=== 시간과 인간의 미래 ===
<ul><li> 시간이란 없다. 있는 것은 일순간뿐이다. 그리고 그곳, 즉 그 일순간에 우리의 모든 생활이 있다. 그러므로 이 순간에 있어서 우리는 모든 힘을 발휘하여야 한다.</li><li> 시간은 흐른다고 우리는 말하고 있다. 그것은 옳지 않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우리들이지 시간이 아니다. 우리가 강을 보트로 갈 때, 움직이는 것은 강가이며 우리가 탄 보트는 아닌 듯이 생각된다. 시간도 마찬가지이다.</li><li> 과거를 기억하고 있거나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을 우리가 받은것은 과거 또는 미래에 대한 고찰에 따라 현재의 행위를 보다 올바르게 결정하기 위함에 다름없고, 과거를 슬퍼하거나 미래의 준비를 하기 위함은 결코 아니다.</li><li> 시간은 우리의 앞과 뒤에 있는 셈이고 우리의 옆에는 없다. 사람은 과거나 미래의 일만 생각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가장 중요한 것, 즉 현재에 있어서의 참생활을 잃어버리게 된다.</li><li> 내일은 생각하지 않음이 좋다. 그러나 내일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의 방법밖엔 없다. 즉 자기는 오늘 이 시간의, 이 순간의 일을 훌륭하게 다했나 어쨌나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방법이 그것이다.</li><li> 만일 오늘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면 결코 그것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당신이 하여야 할 일을 하였는지 못했는지 따위를 죽음은 생각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은 누구든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에 있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그가 지금 하는 일인 것이다.</li><li> 우리가 한 행위의 결과는 모두 우리에겐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위의 결과는 모두 무한한 세계와 시간 속에 무한하기 때문에.
</li></ul>
=== 인간의 행위가 가져다 주는 것 ===
<ul><li> 자기의 활동의 결과를 모두 안다면, 그 활동은 시시한 것임을 알리라.</li><li> 어떤 일에 있어서나 성공을 결정하는 첫째이며 유일한 조건은 참는 일이다. 그리고 모든 일의 가장 큰 장애가 된 것은, 특히 이제껏 나에게 최대의 손해를 준 것은 공연한 참견이었다. 이 사실을 깊이 새겨야 한다.</li><li> 좋은 일은 항상 불의에 닥쳐오는 것으로 노력하면 할수록 도리어 멀어지는 것이다.</li><li> 인간의 행위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기의 의지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의 의지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li><li> 인간은 하여야 할 일을 안 해서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생활을 타락시킨다. 그러므로 좋은 생활을 하려고 함에 있어 사람이 경계하여야 할 일은 하여서는 안 될 일을 않도록 하는 일이다.</li><li> 인간은 자기가 할 필요가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았을 때 비로소 자기가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하여선 안 될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하여야만 할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설령 무엇 때문에 자기가 그 일을 하여야 하는지는 모르더라도.</li><li> 문-급할 때는 무엇을 하는 것이 제일 좋은가. 답-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li><li> 의기소침했을 때는 병자를 거들듯 자신을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장 중요한 일은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li><li> 곤란한 상황이라고 생각할수록 행동을 일으킬 필요는 없게 된다. 우리는 항상 행동을 일으킴으로써 그러지 않아도 좋아지려는 일을 망쳐 놓고 만다.</li><li> 일에 쫓겨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 사람들은 자주 천진한 오락을 거절한다. 그런데 소박하고 유쾌한 게임을 하는 편이 어지간한 일보다 필요하며 중요하다는 일은 덮어 놓고라도, 바쁜 사람들이 오락을 가까이하지 않는 그 일이란 대개는 않는 편이 나은 시시한 일인 것이다.</li><li> 신앙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신앙의 설명에 불과하며, 사회적·국가적 생활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신앙 그것인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얹힌 정도는 이제 올 데까지 와 있어서 대다수의 문명인은 경관에 대하는 신앙만을 가지고 생활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li><li> 국가가 국민에게 매력을 잃은 것은 위정자들이 자기들은 국민의 노동을 이용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멋대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li><li> 나는 하나님과 인간의 계율을 차례로 깨뜨리는 따위의 법률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또 인정할 수도 없다.</li><li> 권력의 토대는 육체적 폭력이다.</li><li> 말하기도 두려운 일이지만 애국심이란 이름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인간끼리의 집단적 폭력은 없었고 지금도 없다.</li><li> 물레방아는 가루를 잘 빻기 위해서 필요하다. 인생은 삶을 훌륭한 것으로 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다.
</li></ul>
=== 행복에의 초대 ===
<ul><li> 모든 사람은 내 몸의 행복만을 바라고 살아가는 것이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바람을 사람들이 가지지 않는다면, 그 인간은 자기가 산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사람은 나의 행복을 비는 기분이 없이는 인생을 생각할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산다는 것은 행복을 획득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li><li> 인간의 생활은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자리에 들기까지의 일련의 행위이다. 사람은 날마다 자기에게 가능한 무수한 행위 속에서 자기가 하여야 할 행위를 끊임없이 선택하여야 한다.</li><li> 만일 사람이 남이 사는 것을 모르고, 쾌락이 만족을 주는 일이 없음을 모르고, 또 이윽고는 자기가 죽는 일이 있음을 모르고 생존한다면 그는 자기가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것이다.</li><li> 동물적 개인의 행복을 버리는 일이야말로 인간의 삶의 법칙이다.</li><li> 개인의 행복을 버리는 일은 미덕도 아니고, 의지도 아니며, 인간의 삶의 피할 수 없는 일이다.</li><li> 동물에게 있어서는 자기 하나의 행복을 목적하지 않는 행동, 즉 자기 자신의 행복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행동은 말할 것도 없이 사는 것을 부정하는 일이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에는 전혀 이것과는 반대다. 자기 하나의 행복만을 얻으려는 인간의 행동은 인간의 삶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다.</li><li>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우리가 자기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인생의 사업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li><li> 기뻐하라! 기뻐하라! 인생의 사업, 인생의 사명은 기쁨이다. 하늘을 보고, 태양을 보고, 별을 보고, 풀을 보고, 나무를 보고, 동물을 보고, 인간을 보고 기뻐하라. 그 기쁨이 어느 무엇에 의해서도 깨지지 않도록 감시하라. 이 기쁨이 깨어지면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당신이 어디서든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 잘못을 찾아내어 바로잡아야 한다.
</li></ul>
=== 삶과 죽음의 의미 ===
<ul><li> 자기만을 사랑하고 남과 싸우면 싸울수록 더욱 남은 전의를 굳히고 칼날을 보일 것이다. 고통을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고통은 심해질 것이다. 죽음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죽음은 더 무서운 것이 될 것이다.</li><li> 죽음은 공포가 아니며, 거짓 삶의 공포라는 가장 좋은 증거는 때때로 사람이 죽음의 공포 때문에 자살하는 사실이다.</li><li>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죽음이 공허와 암흑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공허와 암흑을 보는 것은 그들의 삶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li><li> 육체의 죽음은 공간적 육체와 시간적 의식을 없애는 것이지만, 그러나 삶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 시체와 영혼 존재와의 사이에 성립되는 특수한 관계를 없애는 것은 아니다.</li><li> 죽음의 공포는 사람들이 그들의 잘못된 관념에 의하여 국한된 삶의 한 작은 부분을 인생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다.</li><li> 우리에게는 사람이 죽을 때가 아닌데 죽는 듯이 생각되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사람이 죽는 것은 그것이 그의 행복에 있어 필요할 때에 한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성장하여 어른이 되는 것이 그의 행복에 필요한 때에 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li><li> 죽음과 고통이 재난으로서 사람의 눈에 비치는 것은 사람이 육체적·동물적 존재의 법칙을 삶의 법칙과 혼동할 때뿐이다.</li><li> 삶은 없어질 수 없는 것이다. 삶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다만 삶의 형식을 바꿀 수 있음에 불과하며 이 세상에서의 삶의 나타남을 중절시킬 수 있음에 불과하다.</li><li> 산다는 것은 죽는 것과 같다. 잘 산다는 것은 잘 죽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잘 죽도록 노력하여야 한다.</li><li> 우레 소리가 나는 것은 이미 벼락이 떨어진 것을 말하며, 따라서 벼락에 맞아 죽을 염려는 전혀 없음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레 소리를 들을 때마다 무서워서 벌벌 떤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삶의 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죽음과 더불어 모든 것이 없어지는 줄로 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으로부터 도망하려고 한다. 어리석은 자가 우레 소리를 듣고, 벼락에 맞아 죽을 염려는 전혀 없는데도 도망쳐 가는 듯이.</li><li> 죽음, 그것은 우리의 영혼이 덮어 쓰고 있는 바깥쪽 껍데기의 변형이다. 바깥 껍데기와 그 속에 들어 있는 알맹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li><li>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환상을 무서워하는 것, 즉 없는 것을 무서워하는 것과 같다.</li><li> 죽음을 잃은 생활과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옴을 의식한 생활과는 두 개의 완전히 다른 상태이다. 전자는 동물의 상태에 가깝고, 후자는 하나님의 상태에 가깝다.
</li></ul>
40번째 줄:
<ul><li> 신앙의 사업이란 신앙을 밑받침한 생활에 다름없다. 생활만이 무엇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것으로 생활은 생활에 의해서만 인식되는 하나님 외에 무엇에도 종속될 수는 없다.</li><li> 더러움 없는 진실한 삶은 신앙 속에, 즉 광기 속에 있다.</li><li> 진실한 종교란 인간의 모든 법 위에 있는 법률, 즉 세계의 모든 인간에 대해서 하나밖에 없는 법을 아는 데 있다.</li><li> 자기의 신앙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벌써 신앙이 아니다. 신앙이란 어쩌면 자기는 거짓을 믿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하는 따위의 생각이 절대 떠오르지 않는 경우에만 신앙인 것이다.</li><li> 신앙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남의 말을 그대로 믿는 신앙. 이것은 다른 인간에 대한 신앙이며, 이러한 신앙은 여러 가지가 있다. 다른 하나는 자기를 이 세상에 낳게 한 자에게 자기가 소속되어 있음을 믿는 일.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며, 이러한 신앙은 모든 인간에게 하나밖에 없다.</li><li> 인생의 진정한 법은 극히 간단 명료하며 이해하기 쉬운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그 법을 모른다는 구실로써 자기의 추악한 생활을 변호할 수는 없다. 만일 사람들이 인생의 진실한 법에 반대되는 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그들로서는 이성을 버릴 수밖 에 없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li><li> 사람이 진정한 신앙을 몸에 붙였을 때 그의 몸에는 어두운 방에 불을 켰을 때 그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즉 모든 것이 분명해지고 마음속이 밝아지는 것이다.</li><li> 선과 악의 영원한 상극에 얽히는 인간의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선과 악의 상극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은가. 또 어떻게 살 것인가.――신앙의 문제란 언제나 이들 문제에 대한 것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교회의 가르침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대신 너는 왜 악인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이다. 즉 네가 악인인 것은 아담의 원죄 때문에 너도 그 죄를 이어받아 죄 속에 태어났고 항상 죄 속에 생활했고 죄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li><li> '너희는 모두 죄에 차 있다. 너희 속에 죄 없는 자는 하나도 없다. 어린애조차도 죄에 차 있다. 악에의 지향은 너희의 의지에 의함이 아니라 유전에 의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힘으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 구원받는 길은 또 하나, 항상 기도하며 세례를 받으며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는 길이다.' 이런 가르침보다 더 부도덕한 가르침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li></ul>
=== 교회의 국가적·사회적 역할 ===
<ul><li> 교회의 교의는 조그만 일탈에서 발생한 것일지라도 지금은 그리스도교의 죄악의 적이 되어 있으며, 성직자들은 다른 무엇에봉사하더라도 예수의 가르침에만은 봉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있으므로.</li><li> 그리스도를 짓밟고 발전한 교회의 교의가 펼치는 '그리스도교'가 아주 없었다면 지금 그리스도교 교도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즉 생활의 행복에 대해서의 합리적 가르침에 지금보다 훨씬 가까운 관계에 이르렀을 것이다.</li><li>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입으로는 승인하면서 실생활상으로는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li><li> 지난날엔 교회가 이 세상 사람의 정신 생활을 지도한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약속하고는 그 대신 생활을 위한 인류의 투쟁에서 발을 빼버렸다. 그리고 교회가 그러한 행위를 하자마자 교회는 자기의 사명을 배반한 결과가 되었고 사람들은 교회에 등을 돌려 버렸다. 교회가 멸망한 것은 교회 자신의 타락 때문이 아니라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권력의 비호를 받은 성직자들이 노동의 계율을 배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락과 사치에 대한 그들의 권리가 교회의 타락을 가져온 것이다. 이 권리를 받은 뒤부터 그들은 자기들이 봉사하는 일을 맡은 사람임을 잊고 교회의 일만 걱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직자들은 타락과 방종에 몸을 맡겨 버린 것이다.</li><li> 전도자들이 참으며 고통을 받는 사이에는 교회가 존재했다. 그들이 살이 찌기 시작하자 그들의 전도 활동은 끝났다.</li><li> 예수는 전도자라 칭하고 사제가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든가, 또 성찬식이라면서 빵과 포도주를 끄집어내는 등 마법과도 같은 일을 함은 신을 모독하는 일이라고 금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전도자라고 부르는 일조차 지극히 분명히 금지하고 있다. 또 예수는 교회에서의 기도를 금지했고 각자가 고독한 곳에서 기도하도록 명령했다. 다시 예수는 교회 자체도 금지하고, 자기는 교회를 깨뜨리기 위해서 온 자이며 기도는 교회에서가 아니라 마음속으로 진심을 다하여 하여야 한다고 설파했다. 특히 예수는 지금 여기서 행하여지고 있는 것 같은 일, 즉 남을 재판하고 감금하고 학대하고 모욕하고 벌하는 등의 일을 금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남에 대한 일체의 폭력을 금지했고, 자기는 묶여 있는 사람을 해방하러 왔다고 말했다.</li><li> 교회로서의 교회와 그리스도교와의 사이에는 이름이 같을 뿐 다른 아무런 같은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것들은 완전히 대립하고 적대한 두 개의 원리이다. 즉 전자는 거만, 폭력, 자기 긍정, 고착, 죽음 등이며 후자는 겸허, 참회, 순종, 운동, 삶인 것이다.</li><li> 진정한 그리스도교는 폭력에 의한 권력을 부정하고, 계급적 차별, 부의 축적, 형벌, 전쟁 등 정부와 지배 계급에 유리한 입장을 주는 것을 모조리 부정하고 있다. 이 사실을 정부와 지배 계급은 알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의 입장을 지지하여 주는 종교만을 지지하는 것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교회에 의하여 비뚤어지게 된 그리스도교는 정부와 지배 계급에 유리하게끔 진실한 그리스도교를 비뚤어지게 하고 진짜 그리스도교에 이르는 길을 감추어 버린 것이다.</li><li> 이교도 사회를 이룬 토대는 복수와 폭력이었다. 그것은 그것으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우리들 그리스도교 사회의 토대는 필연적 사랑이며 폭력의 부정이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실제는 폭력이 역시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 칭하면서 설파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아니기 때문이다.</li><li> 사람은 모두 복음서를 읽으면, 이 가르침에 따르자면 어떤 구실과 같이, 즉 복수 때문이건 나의 몸을 지키기 위해서건 남을 구하기 위해서건 이웃에 대하여 악을 행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따라서 그리스도교도이고 싶으면 폭력에 의해서――즉 이웃에 악을 행함에 의해서――지탱되는 자기의 생활을 바꾸든가, 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요구하는 일을 어떻게 하든 자기로부터 감추든가 둘 중의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함을 마음속 깊이에서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갖가지 교의에 따라 바꾼 교회의 거짓 가르침을 손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li><li> 진정한 신앙은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li><li> 교회의 신앙은 일종의 노예제도이다.</li><li> 어떤 제도가 비합리적이며 해로울수록 그것은 외적인 위엄을 자기의 주위에 펼치게 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것은 어느 누구도 끌 수 없었기 때문에.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 의식의 장엄함과 외적인 치장은 교회의 비합리적이며 해로운 본질을 보이는 중요한 표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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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번째 줄:
*권력을 잡고 돈과 높은 자리를 가지며 호사한 생활을 하는 일이 일생 일대의 훌륭한 목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그 목적에 도달할 때까지의 일이고, 그런 것들을 입수하자마자 그것 자체의 가치없음을 드러내고 끌어 붙이는 힘을 차츰 잃어가는 것이다. 즉 그런 것은 멀리서 볼 때만 형태와 아름다움을 감추고 있는 구름 같은 것이다. 구름 속에 들어가면 아름답다고 생각되던 것은 모두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인용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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