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톨스토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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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li> 육체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영혼을 거칠게 내버려야 된다.</li><li> 인간은 자기를 높이 평가할수록 남에 대하여 미움을 가지기 쉽다. 인간은 겸허하면 겸허할수록 선량해지며 화를 내는 일도 적어진다.</li><li> 미움은 항상 무력함에서 발생한다.</li><li> 나의 주위에는 악인이 득실거린다고 당신은 말한다. 만일 당신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 자신도 굉장한 악인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li><li> 사람은 때때로 남의 결점을 파헤침으로써 자기의 존재를 돋보이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결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인간은 총명하고 선량하면 할수록 남의 좋은 점을 발견한다. 그러나 어리석고 짓궂으면 그럴수록 남의 결점을 찾는다.</li><li> 남과의 교섭이 자기에게 있어서나 남에게 있어서나 괴로운 것이 아니게 하기 위해서는, 그 인간에 대해서 사랑을 느끼지 않으면 그와는 교섭을 가지지 않을 일이다.</li><li> 조금 화가 나면 행동을 하기 전에, 혹은 말을 하기 전에 열을 세어라. 몹시 화가 났을 때는 백을 세어라. 화가 날 때마다 이 사실을 상기하면 숫자를 셀 필요조차 없어진다.</li><li> 깊은 강물은 돌을 집어던져도 흐려지지 않는다. 모욕을 받고 이내 발칵하는 인간은 강도 아닌 조그만 웅덩이에 불과하다.</li><li> 죄를 범하는 일은 인간이 하는 일이며, 자기의 죄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악마의 일이다.</li><li> 회개한다는 것은 자기의 죄를 알고 그것과 싸울 것을 각오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에 회개함이 좋다. 램프는 불이 꺼지기 전에 기름을 부어야 하는 것이다.</li><li> 믿음에 의하여, 혹은 남의 용서를 받음으로써 죄를 벗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무엇으로도 죄를 벗을 수는 없다. 다만 자기의 죄를 알고 그 죄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li><li> 자기는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자신에게 말하는 자야말로 불쌍한 자이다.</li><li>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의 죄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대신 그 죄에서 자기가 해방되어 감을 아는 일은 커다란 기쁨이다. 밤이 없다면 우리는 햇볕이 주는 기쁨을 모를 것이다. 죄가 없다면 인간은 정의의 기쁨을 모를 것이다.</li><li> 남에 대한 죄와 자기에 대한 죄가 있다. 남에 대한 죄는 남의 내부에 있는 하나님의 영혼을 존경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자기에 대한 죄는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혼을 존경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li></ul>
=== 시간과[[시간]]과 인간의 미래 ===
<ul><li> 시간이란[[시간]]이란 없다. 있는 것은 일순간뿐이다. 그리고 그곳, 즉 그 일순간에 우리의 모든 생활이 있다. 그러므로 이 순간에 있어서 우리는 모든 힘을 발휘하여야 한다.</li><li> 시간은[[시간]]은 흐른다고 우리는 말하고 있다. 그것은 옳지 않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우리들이지 시간이[[시간]]이 아니다. 우리가 강을 보트로 갈 때, 움직이는 것은 강가이며 우리가 탄 보트는 아닌 듯이 생각된다. 시간도[[시간]]도 마찬가지이다.</li><li> 과거를 기억하고 있거나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을 우리가 받은것은 과거 또는 미래에 대한 고찰에 따라 현재의 행위를 보다 올바르게 결정하기 위함에 다름없고, 과거를 슬퍼하거나 미래의 준비를 하기 위함은 결코 아니다.</li><li> 시간은[[시간]]은 우리의 앞과 뒤에 있는 셈이고 우리의 옆에는 없다. 사람은 과거나 미래의 일만 생각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가장 중요한 것, 즉 현재에 있어서의 참생활을 잃어버리게 된다.</li><li> 내일은 생각하지 않음이 좋다. 그러나 내일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의 방법밖엔 없다. 즉 자기는 오늘 이 시간의[[시간]]의, 이 순간의 일을 훌륭하게 다했나 어쨌나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방법이 그것이다.</li><li> 만일 오늘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면 결코 그것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당신이 하여야 할 일을 하였는지 못했는지 따위를 죽음은 생각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은 누구든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에 있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그가 지금 하는 일인 것이다.</li><li> 우리가 한 행위의 결과는 모두 우리에겐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위의 결과는 모두 무한한 세계와 [[시간]] 속에 무한하기 때문에.
</li></ul>
=== 인간의 행위가 가져다 주는 것 ===
<ul><li> 자기의 활동의 결과를 모두 안다면, 그 활동은 시시한 것임을 알리라.</li><li> 어떤 일에 있어서나 성공을 결정하는 첫째이며 유일한 조건은 참는 일이다. 그리고 모든 일의 가장 큰 장애가 된 것은, 특히 이제껏 나에게 최대의 손해를 준 것은 공연한 참견이었다. 이 사실을 깊이 새겨야 한다.</li><li> 좋은 일은 항상 불의에 닥쳐오는 것으로 노력하면 할수록 도리어 멀어지는 것이다.</li><li> 인간의 행위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기의 의지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의 의지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li><li> 인간은 하여야 할 일을 안 해서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생활을 타락시킨다. 그러므로 좋은 생활을 하려고 함에 있어 사람이 경계하여야 할 일은 하여서는 안 될 일을 않도록 하는 일이다.</li><li> 인간은 자기가 할 필요가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았을 때 비로소 자기가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하여선 안 될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하여야만 할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설령 무엇 때문에 자기가 그 일을 하여야 하는지는 모르더라도.</li><li> 문-급할 때는 무엇을 하는 것이 제일 좋은가. 답-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li><li> 의기소침했을 때는 병자를 거들듯 자신을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장 중요한 일은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li><li> 곤란한 상황이라고 생각할수록 행동을 일으킬 필요는 없게 된다. 우리는 항상 행동을 일으킴으로써 그러지 않아도 좋아지려는 일을 망쳐 놓고 만다.</li><li> 일에 쫓겨 시간이[[시간]]이 없다고 하면서 사람들은 자주 천진한 오락을 거절한다. 그런데 소박하고 유쾌한 게임을 하는 편이 어지간한 일보다 필요하며 중요하다는 일은 덮어 놓고라도, 바쁜 사람들이 오락을 가까이하지 않는 그 일이란 대개는 않는 편이 나은 시시한 일인 것이다.</li><li> 신앙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신앙의 설명에 불과하며, 사회적·국가적 생활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신앙 그것인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얹힌 정도는 이제 올 데까지 와 있어서 대다수의 문명인은 경관에 대하는 신앙만을 가지고 생활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li><li> 국가가 국민에게 매력을 잃은 것은 위정자들이 자기들은 국민의 노동을 이용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멋대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li><li> 나는 하나님과 인간의 계율을 차례로 깨뜨리는 따위의 법률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또 인정할 수도 없다.</li><li> [[권력]]의 토대는 육체적 폭력이다.</li><li> 말하기도 두려운 일이지만 애국심이란 이름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인간끼리의 집단적 폭력은 없었고 지금도 없다.</li><li> 물레방아는 가루를 잘 빻기 위해서 필요하다. 인생은 삶을 훌륭한 것으로 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다.
</li></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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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ul>
=== 삶과 죽음의 의미 ===
<ul><li> 자기만을 사랑하고 남과 싸우면 싸울수록 더욱 남은 전의를 굳히고 칼날을 보일 것이다. 고통을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고통은 심해질 것이다. 죽음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죽음은 더 무서운 것이 될 것이다.</li><li> 죽음은 공포가 아니며, 거짓 삶의 공포라는 가장 좋은 증거는 때때로 사람이 죽음의 공포 때문에 자살하는 사실이다.</li><li>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죽음이 공허와 암흑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공허와 암흑을 보는 것은 그들의 삶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li><li> 육체의 죽음은 공간적 육체와 시간적[[시간]]적 의식을 없애는 것이지만, 그러나 삶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 시체와 영혼 존재와의 사이에 성립되는 특수한 관계를 없애는 것은 아니다.</li><li> 죽음의 공포는 사람들이 그들의 잘못된 관념에 의하여 국한된 삶의 한 작은 부분을 인생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다.</li><li> 우리에게는 사람이 죽을 때가 아닌데 죽는 듯이 생각되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사람이 죽는 것은 그것이 그의 행복에 있어 필요할 때에 한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성장하여 어른이 되는 것이 그의 행복에 필요한 때에 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li><li> 죽음과 고통이 재난으로서 사람의 눈에 비치는 것은 사람이 육체적·동물적 존재의 법칙을 삶의 법칙과 혼동할 때뿐이다.</li><li> 삶은 없어질 수 없는 것이다. 삶은 시간과[[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다만 삶의 형식을 바꿀 수 있음에 불과하며 이 세상에서의 삶의 나타남을 중절시킬 수 있음에 불과하다.</li><li> 산다는 것은 죽는 것과 같다. 잘 산다는 것은 잘 죽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잘 죽도록 노력하여야 한다.</li><li> 우레 소리가 나는 것은 이미 벼락이 떨어진 것을 말하며, 따라서 벼락에 맞아 죽을 염려는 전혀 없음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레 소리를 들을 때마다 무서워서 벌벌 떤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삶의 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죽음과 더불어 모든 것이 없어지는 줄로 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으로부터 도망하려고 한다. 어리석은 자가 우레 소리를 듣고, 벼락에 맞아 죽을 염려는 전혀 없는데도 도망쳐 가는 듯이.</li><li> 죽음, 그것은 우리의 영혼이 덮어 쓰고 있는 바깥쪽 껍데기의 변형이다. 바깥 껍데기와 그 속에 들어 있는 알맹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li><li>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환상을 무서워하는 것, 즉 없는 것을 무서워하는 것과 같다.</li><li> 죽음을 잃은 생활과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옴을 의식한 생활과는 두 개의 완전히 다른 상태이다. 전자는 동물의 상태에 가깝고, 후자는 하나님의 상태에 가깝다.
</li></ul>
===진정한 사랑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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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ul>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ul><li> 하나님이란 나에게 있어서는, 그리고 다른 모든 신앙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근원의 근원이며, 모든 원인의 원인이며, 시간과[[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이며 이성의 극한이다.</li><li> 하나님이란 없으면 살 수 없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살아가는 것은 같은 뜻의 말이다. 하나님이란 삶 바로 그것이다.</li><li>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은, 나는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과 같다.</li><li>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만일 당신도 모든 사람의 행복을 바란다면, 즉 당신이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면 당신의 속에는 하나님이 살고 있는 것이다.</li><li> 나는 나를 보내고 받아들이는 이 알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li><li> 인간은 무엇인가를 사랑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진실로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악한 것을 전혀 포함하지 않은 것뿐이다. 그러니까 악한 것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존재하여야만 한다. 이렇듯 악한 것을 전혀 가지지 않은 것이 또 하나 있다. 즉 하나님이다.</li><li> 하나님에 대해서 남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결코 하나님을 인식할 수는 없을 것이다.</li><li> 사람들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을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로 보지도, 만질 수도 없는 것만이, 즉 우리가 '나'――즉 영혼――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다.</li><li> 가끔 생각하는 일인데, 영혼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기보다는 육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일이 나에게는 더 어렵다. 육체가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육체란 결국은 남의 것이고 영혼만이 자기 것이기 때문이다.</li><li> 인간이 자기 속에 영혼을 의식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그가 영혼을 가지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아직은 자기의 영혼을 의식하기까지는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함에 불과하다.</li><li> 양심이란 모든 사람 속에 살고 있는 영적 존재에 대한 인식이다. 양심은 그러한 인식인 경우에만 인간 생활의 충실한 인도자가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영적 존재에 대한 인식을 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주위 사람들이 나쁘다든가 좋다든가 하는 생각을 양심이라고 생각하기가 쉽다.</li><li> 영혼은 유리이다. 하나님은 그 유리를 통과하는 빛이다.</li><li> 멸망하지 않은 영혼에 있어서는 그 영혼과 똑같이 멸망하지 않는 사업이 필요하다. 영혼에 부과된 그 사업은 자기와 세계의 한없는 완성이다.</li><li> 인간은 모든 사람 속에 자신을 발견할 때, 비로소 자기의 삶을 파악하는 것이다.</li><li> 아이는 어른보다 총명하다. 아이는 인간에게 신분이나 지위가 있음을 모른다. 아이는 자기 안에 사는 영혼과 똑같은 영혼이 누구에게나 있음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li><li> 만일 인간이 모든 이웃에, 세계의 모든 인간과 자기를 묶는 영혼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는 반쯤 자는 상태로 살고 있는 셈이다. 모든 이웃에서 자기와 하나님을 보는 자만이 눈을 뜨고 진실로 사는 자이다.</li><li> 인간이 동물보다 우수한 것은 인간이 동물을 놀릴 수 있기 때문이 아니고 인간이 동물을 불쌍하게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을 불쌍하게 생각함은 자기 속에 사는 영혼과 같은 영혼이 동물 속에도 살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li><li> 설령 그 인간이 아무리 부도덕적이고 불공평하고 우둔하고 불유쾌한 상대라 할지라도 만일 그를 존경하지 않게 되면 당신은 그 때문에 당신과 그와의 맺음뿐만 아니라, 영적 세계와의 관계를 끊어 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겨두는 것이 좋다.
</li></ul>
===종교와 신앙의 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