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러드 밴 오먼 콰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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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하는 것은 변항의 값이다.
** 〈존재하는 것에 관하여〉(1948)
 
* 현대 경험주의는 두 개의 독단에 의해 많은 부분에서 결정되어 왔다. 그 중의 하나는 '''분석적''' 진리와 '''종합적''' 진리―즉 사실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의미에 근거하는 진리와 사실에 근거하는 진리―사이에는 몇 가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믿음이다. 다른 하나의 독단은 '''환원주의'''이다. 즉 개개의 의미 있는 진술은 직접 경험을 지칭하는 용어들로 이루어진 어떤 논리적 구조물과 동치라는 믿음이다. 나는 이 두 개의 독단이 타당한 근거가 없는 것임을 논증할 것이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그것들을 폐기함으로써 생기는 한 가지 결과는 사변적 형이상학과 자연 과학 사이에 가정되었던 경계가 흐려진다는 것이다. 또 다른 결과는 실용주의로의 전환이다.
** 〈경험주의의 두 도그마〉(1951)
 
* 나로서는 비전문적인 물리학자로서 물리적 대상들의 존재를 믿고 있으나, 호메로스의 신들의 존재는 믿고 있지 않다. 그리고 나는 이와 다르게 믿는 것은 과학적인 오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식론적 입장에서 볼 때 물리적 대상들과 신들은 오직 정도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 종류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두 종류의 실재들은 오직 문화적인 요청물로서 우리들의 개념에 들어온다. 물리적 대상들에 관한 신화는 다루기 쉬운 구조를 경험의 흐름에 작용시킬 수 있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다른 신화들보다 좀더 효과적임이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인식론적으로 가장 우월하다.
** 〈경험주의의 두 도그마〉(1951)
 
* 가장 인과적인 지리와 역사의 문제로부터 원자 물리학이나 심지어 순수 수학과 논리학의 가장 심오한 법칙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소위 지식 또는 믿음들의 총체는 오직 그 언저리에서만 경험과 부딪치는 인공적 제조물이다. 바꾸어서 표현하면, 총체 과학이란 경험이 그 경계 조건으로 되는 힘의 장(場)과 같다. 외곽에서 일어나는 경험과의 갈등은 장 내부에서 재정돈된다.
** 〈경험주의의 두 도그마〉(1951)
 
* 집합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편리한 개념틀에 관한 물음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반면에 켄타우로스나 엘름가의 벽돌 집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사실의 물음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 차이가 정도의 차이일 뿐이며, 그것은 모호한 실용적 경향에 의존하므로 완강히 저항하는 어떤 특정 경험을 조정할 경우 과학의 섬유 조직 중 한 가닥을 다른 가닥에 우선하여 수정하게 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한 선택에는 보수주의도 고려되며 단순성의 문제도 계산된다.
** 〈경험주의의 두 도그마〉(19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