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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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오는 미국의 위협에 직면하여 공적으로는 당당한 태도를 취했으며, 사실상 스탈린의 경고들도 무시해 버렸다. 장제스가 모든 힘을 동원하여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전면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한 1946년 스탈린은 마오에게 장과 제휴하고 제2인자 역할을 맡으라고 권유했었다. 스탈린은, 저항하게 되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오랫동안 장에게 호감을 보여 왔었다. 씁쓸하긴 했지만 마오도 이 사실을 알았다. 스탈린은 심지어 장이 1927년 상하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대량 학살을 할 때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고 적대시한 일이 있은 후에도 장을 지원했었다.<br>스탈린이 상하이의 장제스를 지원하다 결국은 우한(武漢)의 공산주의자들과 좌파들을 지원하게 된 것은 정말 싫으면서도 마지못해 취한 조치였다. 1930년대의 통일전선 동안 스탈린은 장에게 비행기와 무기 그리고 군사 고문단―그들 중에는 1927년의 대량 학살 사태를 간발의 차이로 피한 사람도 일부 있었다―을 보내 주었다. 마오에게 그가 보낸 것은 오로지 비행기에 가득 실은 선전 삐라밖에 없었다. 히틀러가 1941년 6월 소련을 공격하자 스탈린은 마오에게 장과의 전쟁을 중단하고 동북구(東北區)의 일본군에 대해 자살적인 공격을 감행하라고 요청했다. 마오는 거절했다.<br>마오는 스탈린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착각하지 않았다. 동시대의 한 소련 역사학자는 "스탈린은 두 중국 정책에 찬성했다"고 말한 바 있다. 스탈린은, 장은 약해서 모스크바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한다고 느꼈다.
** 해리슨 E. 솔즈베리, 《새로운 황제들》(1993), 2. 향산의 시인
 
* 마오의 마음은 철학적이고 시적이다. 그는 중국의 고전들을 보면 편안한 마음을 느꼈다. 그는 공자와 그의 제자 맹자를 알았으며, 명나라와 당나라,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왕조들이 경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는 통계를 지겨워했으며, 이러한 세부 사항들을 부하들에게 맡기고 싶어했다.<br>대장정과 혁명 시기에 마오의 큰 힘은 대중운동의 효력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는 자기가 대중의 힘을 동원한다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하나도 없다고 확신했다. 그는 산을 옮긴 한 늙은이에 관한 그의 유명한 우화를 문자 그대로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국의 어마어마한 인구의 힘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고 스스로 믿었다.
** 해리슨 E. 솔즈베리, 《새로운 황제들》(1993), 14. 덩이 그의 최대사업을 붙들고 늘어지다
 
* 마오는 '총체적인 해결'을 매우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변화의 수단으로서 철학을 신봉했고, 사회는 항상 안정기와 혼란기 사이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믿었다. 변화는 난(亂)의 상태에서 생기는 것이었다. 안정이란 정체(停滯)를 의미했다. 격동 속에서 진보는 이루어지고, 새롭고 유능한 인재와 사상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마오 연구가인 리쩌허우에 의하면, 마오는 전국시대의 역사를 읽은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br>"재미있는 책이다. 그러나 나는 평화로운 시절을 다룬 대목은 싫다. 혼란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평화의 시기는 사람들의 발전에 도움이 안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점을 참을 수 없다."<br>이 모든 것이 마오가 내린 숙명적인 결정에 배경으로 작용했는지 여부는 결코 알 수 없다. 마오는 일기를 쓰지도 않았고 비서들이 그의 모든 생각을 다 알 수도 없었다. 그러나 마오가 장제스를 패배시키고 공산주의 기치 아래 중국을 통일시킨 자신의 역사적 공적을 자부하고 있었고, 문화혁명이라는 십자군은 그보다 더 위대한 사업이라고 믿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가 생각하기에 문화혁명은 자신이 성취한 혁명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완성하기 위한 혁명이었다. 그는 오염과 불순함, 그리고 당 내부로부터의 배반에 의해 혁명이 위기에 처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혁명을 창조한 사람들이 그것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캉성의 독소를 지닌 말이 효력을 발휘했다. 마오가 생각하기에 이 새로운 캠페인에 성공한다면 그것은 1949년의 인민공화국 건국보다도 위대한, 그의 마지막 업적이 될 것이었다. 이는 자신의 이름을 위대한 중국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 황제 중의 황제로서 맨 첫머리에 올려놓게 만들 것이라고 마오는 확신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