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Y-S.Ko (토론 | 기여)
Y-S.Ko (토론 | 기여)
79번째 줄:
 
* 공산당 내에서 거의 매일 벌어지던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 속에서 한때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후난 성 출신의 열정적이고 젊은 지식인이었던 마오쩌둥은 점차 그 자신이 지닌 격정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계급 투쟁과 청산을 포함한 사회주의의 가설은 서로 부딪치도록 설정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공포와 테러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계획된 것이다. 당내 반대파와 계급의 적, ‘착각에 빠진’ 동지에 대한 마오쩌둥의 투쟁은 마지막 남은 인간적인 감정의 잔재마저 모두 없애 버리고 말았다. 그가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동지애가 아니라 증오와 보편적인 의혹이었다. 사랑, 선함, 충성, 신뢰는 그의 메마른 감정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으며, 그의 삶은 키메라처럼 망상을 추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는 결국 냉혈한 공산주의 독재자가 되었고, 권력의 정점에서 고독한 노인이 되고 말았다. 마지막 몇 년 동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정한 접촉으로부터 점차 격리되면서 외롭고 병든 황제는 자신이 저지른 폭정의 결과를 맛보아야 했다.
** 알렉산더 판초프, 스티븐 레빈, 《마오쩌둥 평전》
 
* 그는 사회 관계를 변혁시킨 혁명가일 뿐만 아니라 쑨중산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 모든 나라들이 중국인을 존중하게 만든 위대한 반제국주의 혁명을 실현시킨 민족 영웅이기도 하다. 그는 오랜 기간 분열되어 권력 투쟁을 일삼고 내전으로 신음하던 중국 대륙을 통일시켰다. 중국이 마침내 세계의 지정학적 중심지 가운데 한 곳으로서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대 초강대국과 정치적으로 등거리에 위치하여 세계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된 것도 그가 통치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마오쩌둥의 통치 시기에 중국인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중국 경제는 낙후된 상태였다. 하지만 중국인들이 고대 왕조 시대와 마찬가지로 국가에 대해 자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중국인들이 결코 '위대한 조타수'를 잊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br>마오쩌둥은 민족 해방을 가져왔지만 사회적 노예 상태를 조성하기도 했다. 기만과 폭력을 통해 중국 인민들에게 전체주의적 사회주의의 고통을 강요하고, 그들을 피로 물든 사회적 실험의 구렁텅이로 몰고 간 것은 바로 그와 그가 이끈 공산당이었다. 수억 명의 삶이 이로 인해 고통을 받고 수천만 명이 기아와 억압 속에서 비명횡사했다. 모든 세대가 세계 문화와 고립된 채로 살아야만 했다. 마오쩌둥의 반인륜적 범죄 행위는 스탈린을 비롯한 21세기 다른 독재자들의 사악한 행위 못지않게 끔찍했으며, 그 규모 면에서 훨씬 컸다.
** 알렉산더 판초프, 스티븐 레빈, 《마오쩌둥 평전》
 
* 중국의 유능한 정치가, 역사가, 시인, 철학자, 막강한 권력을 지닌 독재자, 활기 넘치는 조직가, 숙련된 외교가, 유토피아 사회주의자,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의 국가 원수 등 이미 성취한 것에 안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수백만 인민의 삶과 사고방식을 개조하고자 했던 지칠 줄 모르는 혁명가이자 민족 혁명과 피비린내 나는 사회 개혁의 영웅이기도 했다. 이것이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마오쩌둥의 모습이다. 그가 보여준 삶은 규모가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그 의의를 한 가지로 말할 수 없다.
** 알렉산더 판초프, 스티븐 레빈, 《마오쩌둥 평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