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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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Ko (토론 |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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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적으로 문화 혁명의 기초가 되었던 마오쩌둥의 사고는 말 그대로 종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이 혁명 경험을 가져야 한다고 확신한 마오쩌둥은 젊은이들의 "자본주의 복원에 참여한 간부들, 중국의 흐루쇼프, 그리고 그러한 음모에 가담한 자들"에 대한 비판을 방관했다. 이것은 이미 타락한 공산당 관료들을 타파하기 위한 꽤 강력한 혁명 속의 혁명이 될 수 있었다.<br>자신의 스무 살 시절의 꿈을 재발견한 마오쩌둥은 청년들이 오래된 것들을 파괴하고, 가족과 학교, 그리고 사회의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도록 했다. 당시 한때 유행한 구호는 "모든 반란은 정당하다"였다. 이러한 호소에 움직여 봉기한 젊은이들은 사실상 몇 달 동안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시기처럼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공연하게 선언된 그러한 해방은 마오쩌둥에 대한 우상숭배라는 비인간적인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홍위병은 '마오의 광적인 신봉자들'이었다. 그들은 마오쩌둥 자신이 조성한 정치투쟁이라는 틀 속에서 마오쩌둥에 의해 조종되는 단순한 하수인들에 불과했다. 이 전투는 마오쩌둥 자신이 진정한 의미에서 결코 잃은 적이 없었던 권력을 되찾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증거는 무엇일까? 1962년 9월 당시 마오쩌둥은 자신의 몇 마디 말을 통해, 1961년 1월 이후 등장한 모든 대안에 대해 충분히 다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절대적이기를 바랐던 자신의 권력 보따리를 남에게 양도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거리낌 없는 반란을 호소했지만, 그러한 반란은 마오쩌둥 자신이 여러 가지 방어 수단을 통해 저지해왔으며, 또한 자신에 대한 우상숭배를 통해 피해 가려 했던 것이기도 했다. 목적과 수단이 심연처럼 갈라져 있었다. 이제 중국은 그 심연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 알랭 루, 《20세기 중국사》, 8. 유토피아의 제국: 1958~1976
 
* 지금은 인민공사도 평균주의도 실패로 돌아갔다. 인간의 주체적 의지를 담금질했던 그의 문화혁명의 기획은 십년동란으로, 중국현대사의 블랙홀로 먹칠되었다. 돌이켜보면 근 30년 동안 치룬 혁명전쟁, 1945년까지 항일민족전쟁, 45년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내전. 그러나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사회주의 건설시기에 종군해야 했던 항미원조투쟁(抗美援助鬪爭, 6․25 한국동란을 중국에서는 그렇게 명명한다)까지. 종국을 모르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전쟁의 연속으로 드넓은 대륙이 말 그대로 폐허에 다름 아니었을 터, 사회주의중국의 성립으로 세계냉전체제는 강고하게 구축되고, 중국은 오직 자력갱생으로 사회주의건설을 이루어야 했다. 농민혁명인 탓에 대다수 농민이 혁명의 주력을 이루었지만, 농촌에서는 땅에 대한 농민의 집착과 지주들의 횡포가 여전했고, 무엇보다 혁명 이후의 건설과정에서 펑더화이(彭德懷)의 눈물이 입증하듯이 농민주체와 지식인중심의 선진세력과의 간극을 해결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거듭되는 대약진과 인민공사의 실패, 있는 것, 믿을 구석이라고는 노동력뿐인데, 그러나 인간의 주체적 의지만 발동한다고 해서 연철이 강철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데 마오의 고뇌가 있었을 것이다.<br>낮은 수준의 평등과 언어의 통일,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법률적․제도적 보장 등 봉건적․종적 질서의 혁명적 해결, 소수민족의 규합, 대중노선을 통한 문화와 정치, 문화와 혁명의 결합, 그것들일까? 마오의 사회주의가 이루어낸 것들.<br>지난여름 자금성 뒤 인공호수 호우하이(後海), 토요일 밤의 그곳은 여름밤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호수변을 따라 즐비한 카페들, 피서여행을 꿈꿀 수 없는 이들에게는 그 휘황한 서구식 카페들도 그림의 떡일 뿐이다. 밤하늘조차 나누지 않으면 한 발자욱도 나아갈 수 없는 혹서의 밤. 그러나 그 밤을 가르는 것이 있었다. 당시의 기록을 뒤적여본다.
** 백원담, "[http://jbreview.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item=7&no=440 인문산책/백십세의 마오(毛)에게 길을 묻다]", 《진보평론》(2004-07-05)
 
* 마오는 미국의 위협에 직면하여 공적으로는 당당한 태도를 취했으며, 사실상 스탈린의 경고들도 무시해 버렸다. 장제스가 모든 힘을 동원하여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전면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한 1946년 스탈린은 마오에게 장과 제휴하고 제2인자 역할을 맡으라고 권유했었다. 스탈린은, 저항하게 되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오랫동안 장에게 호감을 보여 왔었다. 씁쓸하긴 했지만 마오도 이 사실을 알았다. 스탈린은 심지어 장이 1927년 상하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대량 학살을 할 때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고 적대시한 일이 있은 후에도 장을 지원했었다.<br>스탈린이 상하이의 장제스를 지원하다 결국은 우한(武漢)의 공산주의자들과 좌파들을 지원하게 된 것은 정말 싫으면서도 마지못해 취한 조치였다. 1930년대의 통일전선 동안 스탈린은 장에게 비행기와 무기 그리고 군사 고문단―그들 중에는 1927년의 대량 학살 사태를 간발의 차이로 피한 사람도 일부 있었다―을 보내 주었다. 마오에게 그가 보낸 것은 오로지 비행기에 가득 실은 선전 삐라밖에 없었다. 히틀러가 1941년 6월 소련을 공격하자 스탈린은 마오에게 장과의 전쟁을 중단하고 동북구(東北區)의 일본군에 대해 자살적인 공격을 감행하라고 요청했다. 마오는 거절했다.<br>마오는 스탈린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착각하지 않았다. 동시대의 한 소련 역사학자는 "스탈린은 두 중국 정책에 찬성했다"고 말한 바 있다. 스탈린은, 장은 약해서 모스크바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한다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