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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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제국주의가 지난 9년 동안 중국의 영토 타이완을 점거했다. 얼마 전에 또 그것의 무장부대를 파 견해 레바논을 점거했다. 미국은 전 세계의 많은 나라에 군사기지 몇 백 군데를 건설했다. 중국 영토 타이완, 레바논과 외국에 있는 모든 미국의 군사기지는 다 미국제국주의의 목에 걸린 올가미이다.
** 〈최고 국무회의에서의 연설〉(1958년 9월 8일)
 
== 대화 ==
: '''마오''': 우리는 원자탄과 미사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재래전이든 핵전쟁이든, 어떠한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중국의 경우, 만일 제국주의자들이 우리에 대해 전쟁을 시작한다면, 아마 3억명 이상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전쟁은 전쟁이다. 세월은 지나갈 것이고, 우리는 이전보다 더 많은 아기들을 낳으며 일할 것이다.
: '''안토닌 노보트니''': 그래, 좋다. 당신네들은 3억이 죽어도 아기를 좀 더 낳으면 된다 치자. 우리는 1천 2백만명밖에 없다.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는 모두 다 죽을 것이다. 다시 시작할 사람들은 한 명도 남지 않을 것이다.
 
== 마오쩌둥에 대한 어록 ==
* 전적으로 문화 혁명의 기초가 되었던 마오쩌둥의 사고는 말 그대로 종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이 혁명 경험을 가져야 한다고 확신한 마오쩌둥은 젊은이들의 "자본주의 복원에 참여한 간부들, 중국의 흐루쇼프, 그리고 그러한 음모에 가담한 자들"에 대한 비판을 방관했다. 이것은 이미 타락한 공산당 관료들을 타파하기 위한 꽤 강력한 혁명 속의 혁명이 될 수 있었다.<br>자신의 스무 살 시절의 꿈을 재발견한 마오쩌둥은 청년들이 오래된 것들을 파괴하고, 가족과 학교, 그리고 사회의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도록 했다. 당시 한때 유행한 구호는 "모든 반란은 정당하다"였다. 이러한 호소에 움직여 봉기한 젊은이들은 사실상 몇 달 동안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시기처럼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공연하게 선언된 그러한 해방은 마오쩌둥에 대한 우상숭배라는 비인간적인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홍위병은 '마오의 광적인 신봉자들'이었다. 그들은 마오쩌둥 자신이 조성한 정치투쟁이라는 틀 속에서 마오쩌둥에 의해 조종되는 단순한 하수인들에 불과했다. 이 전투는 마오쩌둥 자신이 진정한 의미에서 결코 잃은 적이 없었던 권력을 되찾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증거는 무엇일까? 1962년 9월 당시 마오쩌둥은 자신의 몇 마디 말을 통해, 1961년 1월 이후 등장한 모든 대안에 대해 충분히 다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절대적이기를 바랐던 자신의 권력 보따리를 남에게 양도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거리낌 없는 반란을 호소했지만, 그러한 반란은 마오쩌둥 자신이 여러 가지 방어 수단을 통해 저지해왔으며, 또한 자신에 대한 우상숭배를 통해 피해 가려 했던 것이기도 했다. 목적과 수단이 심연처럼 갈라져 있었다. 이제 중국은 그 심연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 알랭 루, 《20세기 중국사》, 8. 유토피아의 제국: 1958~1976
 
* 중국 공산주의 역사상 그 어떤 사건도 대장정과 대장정의 전설만큼, 굳은 의지가 있는 사람은 극한의 절망적 상황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준 것은 없었다. 누구보다 많이 이 신념을 불러일으키고 발산시킨 사람은 마오쩌둥이었다.<br>끝없는 투쟁, 영웅적 희생, 자기 부정, 근검, 용기, 이기심의 배제같이 잘 알려진 마오주의의 덕목은 마오 혼자만이 지지해온 가치가 아니라 대장정의 노련한 전사들에 의해 실천되고 전수돼온 가치였다. 이런 금욕적 가치들은 훗날 크게 선전되는 '옌안 정신'의 핵심을 이룬다.<br>대장정 기간에 생존자보다 사망자가 훨씬 많았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옌안 정신에 독특한 공헌을 했다. 살아남았다는 의식은 생존자의 혁명적 사명감에 신성함을 부여했으며 거의 종교에 가까운 헌신을 낳았다. 죽음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사명의 정당성뿐 아니라 지도자의 정책과 지혜를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 마오와 그의 사상을 받아들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옌안의 경험은 단순한 기념의 대상이 아니라 미래의 모델을 제시해주는 살아 있는 혁명전통이었다.<br>옌안의 유산은 제도의 유산과 신성한 혁명적 가치의 유산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러나 둘은 쉽게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민공화국의 정치 경제 교육 부문에 보이는 독특한 마오주의적 요소는 이미 옌안 시기의 제도와 관행에 나타나고 있었다. <br>전쟁과 봉쇄로 인한 어려운 환경은 변구와 게릴라 지역에서 경제적 자급자족의 필요성을 낳았으며 다양한 실험과 개혁을 담은 경제정책을 만들어냈다. 공산주의자들은 전통적인 상호부조를 부분적으로 본뜬 마을 합작형식의 노동조직을 추진했다. 자급자족, 자력갱생, 지방주도는 옌안 경제정책의 슬로건이자 원칙이 되었다.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 옌안 공산주의를 구성하던 많은 요소는 마오 사상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그는 1935년에 아무 생각 없이 산시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마오쩌둥은 1920년 공산주의 사상을 수용할 당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그 나름의 이해와 혁명관을 형성시켜주는 많은 지적 경향을 이미 갖고 있었다. 이런 경향은 1920년대와 1930년대 초 혁명을 겪어나가면서 더욱 강화돼갔다. 역사 속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인간의 의식, 즉 관념과 의지, 그리고 인간의 행동이라는 강한 주의주의적 신념은 마오쩌둥의 초기 지적 경향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마오에게) 헌신적인 혁명가가 자신의 관념과 이상에 따라 사회현실을 만들어나간다는 신앙은 마르크스주의의 강력한 결정론적 교의의 영향하에서도 살아남았다. <br>사회주의에 대한 마오쩌둥의 신앙은 역사발전의 객관적 힘을 믿는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적 확신에 기초하고 있지 않았다. 마오에게 역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필수요소는 인간의 의식적인 행동이었고, 혁명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혁명활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의지였다. 마오주의에서 올바른 사상은 혁명활동의 핵심적인 전제였으며, 이 가정 위에서 옌안 시기에 발전하고 다듬어진 '사상개조'와 '의식개조'를 강조하는 마오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 1949년 혁명의 가장 큰 업적의 하나가 만성적 기아로부터 중국을 완전히 해방시킨 것이라는 사실은 중국 안팎에서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이다. 대약진의 역사적 사실은 이런 믿음을 깨뜨린다. 그러나 이로 인해, 유행하는 묘사들처럼 마오를 스탈린이나 히틀러 같은 대량학살자로 규정해서는 안된다. 아무리 결과가 참혹했다고 하더라도 의도하지 않았고 예측하지 못했던 정치적 행위의 결과와, 계획적이고 고의적인 대량학살 사이에는 엄청난 도덕적 차이가 있는 것이다.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 1958년 대약진운동을 시작할 때 마오가 낙관적으로 묘사했던 '깨끗한 백지'는 1960년대 초 온갖 정치적 사상적 얼룩으로 더러워진 도화지로 변해버렸다. 1964년 마오는 오랜 친구인 앙드레 말로와의 대화에서 "1949년까지 존재했던 중국의 사상 문화 관습을 사라져야만 하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프롤레타리아 중국의 사상 관습 문화가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계승이 아니라 파괴가 1966년 문화대혁명의 막이 올랐을 당시 마오주의의 훈령이었다.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 새로운 관료지배계급에 대한 마오의 인식이 독특했던 점은 그 현상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이 사상이 바로 공산주의 국가의 지도자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마오의 관념은 대단히 이단적이고 정치적 폭발성이 큰 것이었다. 공산당 정권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오가 보기에 중국의 관료들은 재산은 없지만 기능적으로는 부르주아지였으며 적어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 <br>마오가 그토록 환멸하게 된 관료들은 한때는 그의 혁명동지였으며 간부들이었다. 이들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그가 이끌었던 혁명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마오는 이들 대부분이 원래 과거의 모습대로 개혁될 수 있고 사상적으로 개조될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문화대혁명은 혁명운동이라기보다는 비폭력적 개혁운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엄청난 폭력을 초래했던 것은 마오의 마음상태가 아니라 당시 중국의 사회조건과 더 깊은 관련이 있었다.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 8월 5일 마오쩌둥은 중앙위 회의실 문에 자기가 쓴 대자보를 붙여놓았다. 대자보에는 '부르주아 독재'를 시행하는 당 반대세력들의 "사령부를 폭파하라"고 학생 추종자들에게 호소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8월 18일 홍위병이 당과 국가의 권력기구에 대항하는 대중혁명의 선봉으로 임명되었다. 동시에 마오의 가장 절친한 동지로 알려진 린뱌오가 마오의 비공식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이때부터 마오주의자들은 당 조직 전체와 고위 지도자 대부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류사오치와 당 총서기 덩샤오핑에게 공격이 집중되었다. <br>1966년 11월 이후 류샤오치는 이미 더 이상 공식석상에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체포돼 베이징에서 허베이로 이송되는 도중인 1969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이 사실은 10년이 지난 뒤에야 밝혀진다. 1966년 후반 이후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국가원수의 의례적 직무는 인민공화국 부주석이었던 쑹칭링이 맡았다.<br>이 사건이 그토록 독특한 현상이었던 것은 기존 절치질서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라고 요구한 사람이 다름 아닌 그 질서를 세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에 대한 더 중요한 의문은 마오가 왜 반란을 일으키라고 호소했는가가 아니라 도대체 왜 수천만 명에 이르는 보통의 중국시민들이 그의 호소에 반응했나 하는 것이다.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 모든 파벌이 폭력을 사용하고 잔혹행위를 저질렀지만 그 중에서 가장 살벌한 잔혹행위와 가장 큰 인명희생은 인민해방군이 1968년 여름 급진적인 홍위병 조직과 노동자 조직을 전면적으로 억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1980년 사인방에 대한 기소장은 이 비극을 극좌분자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사실상 사망자의 대다수가 지방 군부대에 학살된 급진적인 홍위병들이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br>문화대혁명 동안 지식인이 겪은 고난은 소름끼칠 정도로 (외국에서)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는 반면, 인민해방군에 의해 자행된 대량학살은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 시대의 잔혹행위를, 대중 소설에서 잘 나타나듯이 급진적 마오주의자들 책임으로 모호하게 돌리고 있다. 그러나 급진적 마오주의자들은 지식인 못지않게 마오쩌둥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의 희생자들이었다. 그 수로 따지자면 전자가 후자보다 더 많은 희생을 치렀다.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 마오의 산업혁명은 중국인민에게 고된 노동과 많은 희생을 요구했다. 그러나 E H 카는 이렇게 경고했다. "위험은 우리가 혁명이 낳은 거대한 오점, 인간의 고통스런 대가, 그것의 이름으로 자행된 범죄를 감추는 데 있지 않다. 위험은 우리가 모든 것을 망각해버리고 싶어할 뿐 아니라 그 엄청난 업적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해버리고 싶어 한다는 사실에 있다."<br>사회적 대격변은 이루지 못할 큰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기대가 좌절됐을 때, 꽤 오랜 시간 동안 실제로 이뤄진 역사적 성취가 무시되고 잊혀지면서 환멸감과 냉소주의가 뒤따른다. 우리의 인식에 깊이 박힌 것은 대약진과 문화대혁명의 오점이다. 이런 역사적 모험이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엄청난 인명의 희생을 초래했다는 것을 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미래의 역사가들은 이런 실패와 죄상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인민공화국 역사에서 마오주의 시대를 세계역사상 위대한 근대화를 이룩한 시대의 하나로, 그리고 중국인에게 커다란 사회적 인간적 이득을 가져다준 시대로 틀림없이 기록할 것이다.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 지금은 인민공사도 평균주의도 실패로 돌아갔다. 인간의 주체적 의지를 담금질했던 그의 문화혁명의 기획은 십년동란으로, 중국현대사의 블랙홀로 먹칠되었다. 돌이켜보면 근 30년 동안 치룬 혁명전쟁, 1945년까지 항일민족전쟁, 45년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내전. 그러나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사회주의 건설시기에 종군해야 했던 항미원조투쟁(抗美援助鬪爭, 6․25 한국동란을 중국에서는 그렇게 명명한다)까지. 종국을 모르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전쟁의 연속으로 드넓은 대륙이 말 그대로 폐허에 다름 아니었을 터, 사회주의중국의 성립으로 세계냉전체제는 강고하게 구축되고, 중국은 오직 자력갱생으로 사회주의건설을 이루어야 했다. 농민혁명인 탓에 대다수 농민이 혁명의 주력을 이루었지만, 농촌에서는 땅에 대한 농민의 집착과 지주들의 횡포가 여전했고, 무엇보다 혁명 이후의 건설과정에서 펑더화이(彭德懷)의 눈물이 입증하듯이 농민주체와 지식인중심의 선진세력과의 간극을 해결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거듭되는 대약진과 인민공사의 실패, 있는 것, 믿을 구석이라고는 노동력뿐인데, 그러나 인간의 주체적 의지만 발동한다고 해서 연철이 강철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데 마오의 고뇌가 있었을 것이다.<br>낮은 수준의 평등과 언어의 통일,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법률적․제도적 보장 등 봉건적․종적 질서의 혁명적 해결, 소수민족의 규합, 대중노선을 통한 문화와 정치, 문화와 혁명의 결합, 그것들일까? 마오의 사회주의가 이루어낸 것들.<br>지난여름 자금성 뒤 인공호수 호우하이(後海), 토요일 밤의 그곳은 여름밤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호수변을 따라 즐비한 카페들, 피서여행을 꿈꿀 수 없는 이들에게는 그 휘황한 서구식 카페들도 그림의 떡일 뿐이다. 밤하늘조차 나누지 않으면 한 발자욱도 나아갈 수 없는 혹서의 밤. 그러나 그 밤을 가르는 것이 있었다. 당시의 기록을 뒤적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