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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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오는 중난하이에 돌아온 이후로 갈수록 바깥세상과 동떨어져서 여러날 혹은 수주일에서 수개월씩 침대에 축 늘어져 있는 생활 속에 빠져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회의에 참석하고, 새로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지방 시찰을 하는 등 거의 광적으로 일에 매달렸다.<br>마오의 비현실적이고 꿈 같은 사고방식이나 끝없이 날아가는 환상의 세계에서 확실히 아편 냄새가 났다. 문제는 마오의 이런 추상적 사변이나 환상이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 중국의 국내외 정책에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 해리슨 E. 솔즈베리, 《새로운 황제들》(1993), 32. 린뱌오의 그림자
 
*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 그를 빼놓고는 중국의 현대사를 말할 수 없다. 마오쩌둥(이하 마오)은 ‘혁명으로서의 사회주의’와 ‘제도로서의 사회주의’ 모두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마오는 자기 자신이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에 대해 공(功)이 70%, 과(過)가 30%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 마오에 대한 인민의 평가도 여기서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마오에 대한 평가가 쉽지 않은 것은 이처럼 공과 과가 한 몸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레닌의 공과 스탈린의 과’로 비교적 딱 떨어지게 평가하는 소련 공산당과 비교되는 부분이기도 하다.<br>마오는 죽은 지 40년이 가까워 오지만 그의 유령은 아직도 중국대륙을 배회하고 있다. 그 이유는 중국 인민들의 고단한 현실이 마오를 부단히 불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주민 종교 신앙 조사에 따르면 중국인 가정 중에 마오상(像)을 모시는 경우가 11.5%에 달했는데, 이는 조상신을 모시는 가정(12.1%) 다음 순위였다. 그 다음 불상이 9.9%, 재물신이 9.3%였다. 그만큼 마오는 아직도 중국 인민들에게 밀착되어 그들의 사고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런 현상은 중국 사회 내부의 극단적 ‘단절’이 심화되고 민생이 도탄에 빠질수록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G2를 넘어 G1이 멀지 않아 보이는 중국의 또 다른 모습이다. 문제는 그럴수록 마오의 행동과 사상이 중국 인민들에게 객관적 대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데 있다.<br>이러한 현상은 지식인 사회에도 나타나고 있다. 인민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 인민들에게 마오가 살아 있는 것처럼 지식인도 마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최근 담론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 근원에는 문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메타포(metaphor)의 대립’이 존재한다. 1990년대에 있었던 신좌파-자유주의 논쟁으로부터 대립은 시작되었다. 신좌파는 1990년대 나타난 중국 사회의 문제가 중국이 전 지구화(globalization)의 구성 부분이 되면서 나타난 시장 패권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시장에 권력이 과도하게 간섭한 것이 문제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들은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에도 전제주의의 잔재가 강력하게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 조경란, "중국인의 자기성찰 가로막는 거대한 그림자...마오쩌둥은 여전히 살아있다", 주간조선 (2014.06.01)
 
*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마오를 서술할 때 주목해봐야 할 것은 바로 마오가 혁명가이면서 정치가이지만, 동시에 이상주의적 사상가이면서 시인이라는 사실이다. 마오 연구가인 리저허우(李澤厚)도, 벤저민 슈워츠(Benjamin Schuwartz)도 이 점에 주목하는데, 마오는 학창 시절 다른 것은 몰라도 작문 시험에서는 1등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리저허우는 마오의 사상적 특색이 그의 시사(詩詞) 창작 속에서 부단히 표현되었으며 마오의 사상과 개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청년 시절 마오는 “애석하게도 저는 지나치게 감정이 풍부하여 너무 의분에 빠져 슬퍼하고 분개하는 병폐를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한 적이 있다. 벤저민 슈워츠는 심지어 마오에게서 시가 변증법, 인식론보다 더 중요한 철학의 핵심을 이룬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로 보면 마오의 주의주의와 주관주의는 그의 시적 감수성에 의해 강화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제 이런 면들을 배면에 깔고 마오의 극적인 인생과 사상을 살핀다면 그를 이해하는 데 좀 더 도움이 될 것이다.
** 조경란, "중국 지식인의 초상 마오쩌둥, 유토피아를 꿈꾼 시인이자 독재자", 주간조선 (2014.06.15)
 
* 마오가 후대에 물려준 것은 복잡하고 풍부한 유산이며, 먹을 수도 없지만 버릴 수도 없는 과실이다. 중국 역사에서 보기 드문 유토피아 사상가이자 독재자로서 그의 사상과 실천 속에서 천재적인 상상과 심각한 후과가 하나로 교직되어 있다. 서방 공업 문명의 폐단을 피하고 비(非)서구의 현대화 노선을 탐색했던 천재적인 마오의 상상과 실험은 그가 새롭게 세워낸 전제체제와 이로부터 발생한 엄중한 후과가 하나로 밀착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