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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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오가 후대에 물려준 것은 복잡하고 풍부한 유산이며, 먹을 수도 없지만 버릴 수도 없는 과실이다. 중국 역사에서 보기 드문 유토피아 사상가이자 독재자로서 그의 사상과 실천 속에서 천재적인 상상과 심각한 후과가 하나로 교직되어 있다. 서방 공업 문명의 폐단을 피하고 비(非)서구의 현대화 노선을 탐색했던 천재적인 마오의 상상과 실험은 그가 새롭게 세워낸 전제체제와 이로부터 발생한 엄중한 후과가 하나로 밀착되어 있는 것이다.
** 첸리췬(錢理群),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 1949~2009》
 
* 마오의 목표가 마르크스주의의 사회 개조 격납고에서 나왔다는 것은 과거보다 훨씬 더 명쾌하다. 이것은 중국인의 정신을 균형에서 벗어나 양극화로, 조화에서 벗어나 투쟁으로, 개인적 가치에서 벗어나 동양의 스파르타 같은 집단적인 가치로 개혁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결과 목표와 방법이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마오쩌둥 시대에 많은 비극이 야기됐다.
** 로스 테릴, 《마오쩌둥》
 
* 이 책은 20세기 위대한 혁명가이자 막강한 폭군이었던 인물에 관한 책이다. 그는 다음 두 가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나는 외세의 침략에서 나라를 해방시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독재 수단을 통해 모든 이가 평등한 이상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첫 번째 임무를 성공했으나 두 번째 임무는 실패했다. 중국은 마침내 마오쩌둥이 통치하던 시절에 지정학적으로 세계의 중심이 되고 정치적으로 양대 초강대국과 등거리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만과 폭력을 바탕으로 참을성 있는 중국 인민들에게 전체주의적 사회주의를 강요하고, 그들을 피비린내 나는 사회 실험의 나락으로 몰고 간 것 역시 마오쩌둥과 그가 이끈 공산당이었다. 그 결과 기아와 억압으로 인해 수백만 명이 죽음에 이르렀다. 마오쩌둥은 국가를 통치하면서 “사람을 귀하게 여긴다.”라는 공자의 현명하고 인간적인 교훈을 따르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마오주의자들의 실험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