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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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오의 가장 큰 이율배반을 보여준 사례는 마오가 문화혁명의 마오주의적 좌파들을 제거함으로써 문화대혁명을 종결시켰다는 점이었다. 그 좌파들은 처음에는 ‘극좌'에서 다시 '극우'로, '트로츠키주의자'로, 제국주의의 '첩자'로 다양한 죄명을 받고 사라져갔다. 1950년대 후반 반우파투쟁시기에 이미 등장한 이런 이율배반은 문화혁명기에 극단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억제를 벗어나 폭발한 대중운동은 사회주의 하에서의 억압의 핵심적 적대세력으로 당관료를 지목하였고, 올바른 당과 잘못된 당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기관화한 당기구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나아갔다. 대중운동을 지도하는 당이 아니라 당을 전복하는 대중운동이라는 역설에 직면한 마오는 결국 당의 편에 섰고, 인민해방군이라는 억압장치가 대중운동을 억누르게 되었으며, 당이 두 가지 노선에 의해 균열되어 있다는 입장을 버리고 당을 숙정함으로써 당의 무오류성을 회복하는 입장으로 전환하게 된다.
** 백승욱, [http://www.pssp.org/bbs/view.php?board=j2021&nid=1790&category1=58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2005.5)
 
 
* 지금은 인민공사도 평균주의도 실패로 돌아갔다. 인간의 주체적 의지를 담금질했던 그의 문화혁명의 기획은 십년동란으로, 중국현대사의 블랙홀로 먹칠되었다. 돌이켜보면 근 30년 동안 치룬 혁명전쟁, 1945년까지 항일민족전쟁, 45년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내전. 그러나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사회주의 건설시기에 종군해야 했던 항미원조투쟁(抗美援助鬪爭, 6․25 한국동란을 중국에서는 그렇게 명명한다)까지. 종국을 모르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전쟁의 연속으로 드넓은 대륙이 말 그대로 폐허에 다름 아니었을 터, 사회주의중국의 성립으로 세계냉전체제는 강고하게 구축되고, 중국은 오직 자력갱생으로 사회주의건설을 이루어야 했다. 농민혁명인 탓에 대다수 농민이 혁명의 주력을 이루었지만, 농촌에서는 땅에 대한 농민의 집착과 지주들의 횡포가 여전했고, 무엇보다 혁명 이후의 건설과정에서 펑더화이(彭德懷)의 눈물이 입증하듯이 농민주체와 지식인중심의 선진세력과의 간극을 해결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거듭되는 대약진과 인민공사의 실패, 있는 것, 믿을 구석이라고는 노동력뿐인데, 그러나 인간의 주체적 의지만 발동한다고 해서 연철이 강철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데 마오의 고뇌가 있었을 것이다.<br>낮은 수준의 평등과 언어의 통일,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법률적․제도적 보장 등 봉건적․종적 질서의 혁명적 해결, 소수민족의 규합, 대중노선을 통한 문화와 정치, 문화와 혁명의 결합, 그것들일까? 마오의 사회주의가 이루어낸 것들.<br>지난여름 자금성 뒤 인공호수 호우하이(後海), 토요일 밤의 그곳은 여름밤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호수변을 따라 즐비한 카페들, 피서여행을 꿈꿀 수 없는 이들에게는 그 휘황한 서구식 카페들도 그림의 떡일 뿐이다. 밤하늘조차 나누지 않으면 한 발자욱도 나아갈 수 없는 혹서의 밤. 그러나 그 밤을 가르는 것이 있었다. 당시의 기록을 뒤적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