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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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오가 후대에 물려준 것은 복잡하고 풍부한 유산이며, 먹을 수도 없지만 버릴 수도 없는 과실이다. 중국 역사에서 보기 드문 유토피아 사상가이자 독재자로서 그의 사상과 실천 속에서 천재적인 상상과 심각한 후과가 하나로 교직되어 있다. 서방 공업 문명의 폐단을 피하고 비(非)서구의 현대화 노선을 탐색했던 천재적인 마오의 상상과 실험은 그가 새롭게 세워낸 전제체제와 이로부터 발생한 엄중한 후과가 하나로 밀착되어 있는 것이다.
** 첸리췬(錢理群),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 1949~2009》
 
* 질문하셨듯이, 중국의 민간사상가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바로 마오저둥과의 관계이지요. 중국은 사상 통제가 세계에서 가장 심한 국가입니다. 따라서 이런 민간사상가들이 자신의 사상적 자원을 찾거나 많은 자원을 접하기는 어렵습니다. 마오저둥은 그들의 사상을 일깨웠습니다. 마오저둥의 사상은 중국에서 이중 역할을 합니다. 그의 사상은 체제의 대표이자 건설자입니다. 또한 반체제적이고 이단적인 면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이단적인 면이 자주 영향을 미치지요. 방금 분석한 부 시기에서 마오는 어느 정도 이런 환경을 조성하였습니다. 1957년 마오는 ‘鳴放’을 제시해 모두가 의견을 밝히도록 권장했고, 문혁은 마오가 주동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마오의 반항적인 면을 보여줍니다. 이런 것이 공교롭게도 환경을 조성한 데다 그의 글이 이런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노예제도를 반대하고 독립적 사고를 주장했던 것이지요. 특히 마오저둥 시대의 민간사상가는 모두 처음에는 그의 ‘신도’였습니다. 심지어 그에게 부응해 반항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마오는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반항할 수는 있지만 나에게 반항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드시 마오의 사상 범위 안에서 생각해야 하고 그가 허락한 범위 안에서 반항해야 합니다. 만약 이 울타리를 벗어나면 탄압을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그는 사상의 계몽가인 동시에 민간사상가에 대한 탄압의 주체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민간사상가들은 그의 영향으로 독립적인 사고를 견지했지만 결국은 필연적으로 그에게 반항했습니다. 거의 모든 민간사상가가 마오저둥의 ‘신도’에서 ‘반항자’로 변모하는 이런 과정을 겪었습니다. 문혁 때는 저 역시도 ‘마오저둥주의자’였습니다.
** 첸리췬(錢理群), 조경란과의 대담 〈‘중국’을 회의하며 계몽하다 -중국문학사 연구자 첸리췬(錢理群)-〉, 東方學志 제163집(2013년 9월), 289~324쪽에서 인용.
 
* 마오의 목표가 마르크스주의의 사회 개조 격납고에서 나왔다는 것은 과거보다 훨씬 더 명쾌하다. 이것은 중국인의 정신을 균형에서 벗어나 양극화로, 조화에서 벗어나 투쟁으로, 개인적 가치에서 벗어나 동양의 스파르타 같은 집단적인 가치로 개혁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결과 목표와 방법이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마오쩌둥 시대에 많은 비극이 야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