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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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Ko (토론 |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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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 옌안 공산주의를 구성하던 많은 요소는 마오 사상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그는 1935년에 아무 생각 없이 산시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마오쩌둥은 1920년 공산주의 사상을 수용할 당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그 나름의 이해와 혁명관을 형성시켜주는 많은 지적 경향을 이미 갖고 있었다. 이런 경향은 1920년대와 1930년대 초 혁명을 겪어나가면서 더욱 강화돼갔다. 역사 속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인간의 의식, 즉 관념과 의지, 그리고 인간의 행동이라는 강한 주의주의적 신념은 마오쩌둥의 초기 지적 경향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마오에게) 헌신적인 혁명가가 자신의 관념과 이상에 따라 사회현실을 만들어나간다는 신앙은 마르크스주의의 강력한 결정론적 교의의 영향하에서도 살아남았다. <br>사회주의에 대한 마오쩌둥의 신앙은 역사발전의 객관적 힘을 믿는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적 확신에 기초하고 있지 않았다. 마오에게 역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필수요소는 인간의 의식적인 행동이었고, 혁명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혁명활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의지였다. 마오주의에서 올바른 사상은 혁명활동의 핵심적인 전제였으며, 이 가정 위에서 옌안 시기에 발전하고 다듬어진 '사상개조'와 '의식개조'를 강조하는 마오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 1949년 혁명의 가장 큰 업적의 하나가 만성적 기아로부터 중국을 완전히 해방시킨 것이라는 사실은 중국 안팎에서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이다. 대약진의 역사적 사실은 이런 믿음을 깨뜨린다. 그러나 이로 인해, 유행하는 묘사들처럼 마오를 스탈린이나 히틀러 같은 대량학살자로 규정해서는 안된다. 아무리 결과가 참혹했다고 하더라도 의도하지 않았고 예측하지 못했던 정치적 행위의 결과와, 계획적이고 고의적인 대량학살 사이에는 엄청난 도덕적 차이가 있는 것이다.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 1958년 대약진운동을 시작할 때 마오가 낙관적으로 묘사했던 '깨끗한 백지'는 1960년대 초 온갖 정치적 사상적 얼룩으로 더러워진 도화지로 변해버렸다. 1964년 마오는 오랜 친구인 앙드레 말로와의 대화에서 "1949년까지 존재했던 중국의 사상 문화 관습을 사라져야만 하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프롤레타리아 중국의 사상 관습 문화가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계승이 아니라 파괴가 1966년 문화대혁명의 막이 올랐을 당시 마오주의의 훈령이었다.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 새로운 관료지배계급에 대한 마오의 인식이 독특했던 점은 그 현상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이 사상이 바로 공산주의 국가의 지도자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마오의 관념은 대단히 이단적이고 정치적 폭발성이 큰 것이었다. 공산당 정권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오가 보기에 중국의 관료들은 재산은 없지만 기능적으로는 부르주아지였으며 적어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 <br>마오가 그토록 환멸하게 된 관료들은 한때는 그의 혁명동지였으며 간부들이었다. 이들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그가 이끌었던 혁명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마오는 이들 대부분이 원래 과거의 모습대로 개혁될 수 있고 사상적으로 개조될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문화대혁명은 혁명운동이라기보다는 비폭력적 개혁운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엄청난 폭력을 초래했던 것은 마오의 마음상태가 아니라 당시 중국의 사회조건과 더 깊은 관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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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5일 마오쩌둥은 중앙위 회의실 문에 자기가 쓴 대자보를 붙여놓았다. 대자보에는 '부르주아 독재'를 시행하는 당 반대세력들의 "사령부를 폭파하라"고 학생 추종자들에게 호소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8월 18일 홍위병이 당과 국가의 권력기구에 대항하는 대중혁명의 선봉으로 임명되었다. 동시에 마오의 가장 절친한 동지로 알려진 린뱌오가 마오의 비공식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이때부터 마오주의자들은 당 조직 전체와 고위 지도자 대부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류사오치와 당 총서기 덩샤오핑에게 공격이 집중되었다. <br>1966년 11월 이후 류샤오치는 이미 더 이상 공식석상에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체포돼 베이징에서 허베이로 이송되는 도중인 1969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이 사실은 10년이 지난 뒤에야 밝혀진다. 1966년 후반 이후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국가원수의 의례적 직무는 인민공화국 부주석이었던 쑹칭링이 맡았다.<br>이 사건이 그토록 독특한 현상이었던 것은 기존 절치질서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라고 요구한 사람이 다름 아닌 그 질서를 세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에 대한 더 중요한 의문은 마오가 왜 반란을 일으키라고 호소했는가가 아니라 도대체 왜 수천만 명에 이르는 보통의 중국시민들이 그의 호소에 반응했나 하는 것이다.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 모든 파벌이 폭력을 사용하고 잔혹행위를 저질렀지만 그 중에서 가장 살벌한 잔혹행위와 가장 큰 인명희생은 인민해방군이 1968년 여름 급진적인 홍위병 조직과 노동자 조직을 전면적으로 억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1980년 사인방에 대한 기소장은 이 비극을 극좌분자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사실상 사망자의 대다수가 지방 군부대에 학살된 급진적인 홍위병들이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br>문화대혁명 동안 지식인이 겪은 고난은 소름끼칠 정도로 (외국에서)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는 반면, 인민해방군에 의해 자행된 대량학살은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 시대의 잔혹행위를, 대중 소설에서 잘 나타나듯이 급진적 마오주의자들 책임으로 모호하게 돌리고 있다. 그러나 급진적 마오주의자들은 지식인 못지않게 마오쩌둥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의 희생자들이었다. 그 수로 따지자면 전자가 후자보다 더 많은 희생을 치렀다.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