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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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Ko (토론 |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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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오와 그의 사상을 받아들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옌안의 경험은 단순한 기념의 대상이 아니라 미래의 모델을 제시해주는 살아 있는 혁명전통이었다.<br>옌안의 유산은 제도의 유산과 신성한 혁명적 가치의 유산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러나 둘은 쉽게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민공화국의 정치 경제 교육 부문에 보이는 독특한 마오주의적 요소는 이미 옌안 시기의 제도와 관행에 나타나고 있었다. <br>전쟁과 봉쇄로 인한 어려운 환경은 변구와 게릴라 지역에서 경제적 자급자족의 필요성을 낳았으며 다양한 실험과 개혁을 담은 경제정책을 만들어냈다. 공산주의자들은 전통적인 상호부조를 부분적으로 본뜬 마을 합작형식의 노동조직을 추진했다. 자급자족, 자력갱생, 지방주도는 옌안 경제정책의 슬로건이자 원칙이 되었다.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 새로운 관료지배계급에 대한 마오의 인식이 독특했던 점은 그 현상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이 사상이 바로 공산주의 국가의 지도자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마오의 관념은 대단히 이단적이고 정치적 폭발성이 큰 것이었다. 공산당 정권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오가 보기에 중국의 관료들은 재산은 없지만 기능적으로는 부르주아지였으며 적어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 <br>마오가 그토록 환멸하게 된 관료들은 한때는 그의 혁명동지였으며 간부들이었다. 이들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그가 이끌었던 혁명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마오는 이들 대부분이 원래 과거의 모습대로 개혁될 수 있고 사상적으로 개조될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문화대혁명은 혁명운동이라기보다는 비폭력적 개혁운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엄청난 폭력을 초래했던 것은 마오의 마음상태가 아니라 당시 중국의 사회조건과 더 깊은 관련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