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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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김수영 역)
 
* 직업 전문화에 대한 혐오, 지식인과 전문가에 대한 불신, 관료제에 대한 혐오, 도시에 대한 편견, 자기희생에 대한 낭만적 정서 등 마오의 정신구조가 갖고 있는 여타의 특징도 전형적으로 인민주의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공산주의의 외피를 걸친 내셔널리스트가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자의 가면을 쓴 인민주의자도 아니었다.<br>마오의 인민주의적 사상과 경향은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고 적용시켜나가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잠재적인 사회주의 의식을 농민에게 부여함으로써 마오쩌둥은 마르크스뿐 아니라 레닌으로부터도 점점 멀어졌다
* 마오는 사회주의의 건설자로서보다는 경제적 근대화를 이룩한 사람으로서 더 성공적이었다.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김수영 역)
 
* 새로운 관료지배계급에 대한 마오의 인식이 독특했던 점은 그 현상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이 사상이 바로 공산주의 국가의 지도자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마오의 관념은 대단히 이단적이고 정치적 폭발성이 큰 것이었다. 공산당 정권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오가 보기에 중국의 관료들은 재산은 없지만 기능적으로는 부르주아지였으며 적어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br>마오가 그토록 환멸하게 된 관료들은 한때는 그의 혁명동지였으며 간부들이었다. 이들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그가 이끌었던 혁명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마오는 이들 대부분이 원래 과거의 모습대로 개혁될 수 있고 사상적으로 개조될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문화대혁명은 혁명운동이라기보다는 비폭력적 개혁운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엄청난 폭력을 초래했던 것은 마오의 마음상태가 아니라 당시 중국의 사회조건과 더 깊은 관련이 있었다.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김수영 역)
 
* 종국적으로 마오는 사회주의의 건설자로서보다는 경제적 근대화를 이룩한 사람으로서 더 성공적이었다. 마오주의의 경제적 유산을 비판하는 글들은 대개 업적보다는 결점에 더 주목하고 있지만, 마오쩌둥 시대에 공업총생산은 38배, 중공업생산은 90배 늘었다. 그것도 아주 미약한 근대적 공업기반에서, 그 생산마저 외세의 침략과 내전의 피해로 절반이나 감소한 상태에서 시작해 그런 결과를 낳았다. 마오쩌둥 시대 전체를 보면 중국의 순생산에서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23%에서 50%로 증가했고 농업 비중은 58%에서 34%로 감소했다.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김수영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