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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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Ko (토론 |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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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중국 국가는 헌법에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의 사상을 계승한다고 하며 중국 사회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회’라고 선전한다. 그러나 소련의 스탈린주의든, 그 변형된 버전인 마오쩌둥주의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운동이자 이론이다. 그러나 앞의 두 경향은 계급 기반에서부터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다르다.<br>마오쩌둥주의는 1925~1927년 중국 노동자 혁명이 패배한 것의 산물이었다. 1930~1940년대 중국에서 이 운동은 제3세계에서 벌어진 민족해방 운동의 일부였다. 그러나 일단 민족해방 혁명이 승리하고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이 국가 권력을 쥐게 되면서, 마오쩌둥주의는 중국의 국가자본주의 발전을 정당화하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됐다. 그리고 오늘날의 중국이 시장 스탈린주의 체제가 되면서, ‘사회주의’ 중국이 주는 이데올로기적 호소력은 냉전 때보다는 훨씬 약화했다. 중국 안팎 마오쩌둥주의의 역사적 궤적은 오늘날 자본주의 위기의 시대에 이런 정치가 근본적 대안을 제시해 주지 못함을 보여 준다.
** 김영익, 〈마오쩌둥주의 제대로 보기〉, 《마르크스21》 (2021년 7~8월)
 
* 마오쩌둥의 치명적 과오는 건국(1949년) 후 나라를 다스리면서 전개한 소위 문화혁명(1966~76년)이었다. 혁명과 전쟁으로 뒤집어진 세상을 한 번 더 뒤집으라고 마오쩌둥은 홍위병(紅衛兵)에게 명령했다. 이때 마오쩌둥은 ‘사령부를 폭격하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직접 썼고 ‘조반유리(造反有理)’라는 말로 반란을 선동했다. 10대 학생·대학생이 주력인 홍위병이 당과 국가의 제도, 기관을 공격하면서 중국은 내전 상황으로 치달았다. 문혁 10년간 중국 대륙 전역이 폭력과 혼돈의 광기에 휩싸였다. 마오쩌둥은 펑더화이, 류사오치(劉少奇), 덩샤오핑, 린뱌오 등 대장정의 동지들을 적으로 내몰아 일부는 제거·처단했다. 현 중국 주석인 시진핑의 아버지(시중쉰·習仲勳)도 문혁의 희생자였다. 중국 대륙을 온통 자기 손아귀에 넣고 뒤흔들어 보겠다는 마오쩌둥의 권력 욕심이 문혁을 배태한 요인이었다. 세상을 좋게 뒤집는 혁명적 애국심과 세상을 뒤집어 망치는 무분별한 권력욕이 마오쩌둥 안에 혼재하고 있었던 셈이다.
** 김종필, 〈[https://www.joongang.co.kr/article/19145824#home JP “혁명은 원래 애국심에서 나와 마오쩌둥의 대장정도 그랬다” “인민 잘 살게 하는 게 최상의 가치 덩샤오핑 ‘흑묘백묘’ 5·16 정신과 일치”]〉, 《중앙일보》 (2015. 11. 27.)
 
* 전적으로 문화 혁명의 기초가 되었던 마오쩌둥의 사고는 말 그대로 종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이 혁명 경험을 가져야 한다고 확신한 마오쩌둥은 젊은이들의 "자본주의 복원에 참여한 간부들, 중국의 흐루쇼프, 그리고 그러한 음모에 가담한 자들"에 대한 비판을 방관했다. 이것은 이미 타락한 공산당 관료들을 타파하기 위한 꽤 강력한 혁명 속의 혁명이 될 수 있었다.<br>자신의 스무 살 시절의 꿈을 재발견한 마오쩌둥은 청년들이 오래된 것들을 파괴하고, 가족과 학교, 그리고 사회의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도록 했다. 당시 한때 유행한 구호는 "모든 반란은 정당하다"였다. 이러한 호소에 움직여 봉기한 젊은이들은 사실상 몇 달 동안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시기처럼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공연하게 선언된 그러한 해방은 마오쩌둥에 대한 우상숭배라는 비인간적인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홍위병은 '마오의 광적인 신봉자들'이었다. 그들은 마오쩌둥 자신이 조성한 정치투쟁이라는 틀 속에서 마오쩌둥에 의해 조종되는 단순한 하수인들에 불과했다. 이 전투는 마오쩌둥 자신이 진정한 의미에서 결코 잃은 적이 없었던 권력을 되찾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증거는 무엇일까? 1962년 9월 당시 마오쩌둥은 자신의 몇 마디 말을 통해, 1961년 1월 이후 등장한 모든 대안에 대해 충분히 다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절대적이기를 바랐던 자신의 권력 보따리를 남에게 양도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거리낌 없는 반란을 호소했지만, 그러한 반란은 마오쩌둥 자신이 여러 가지 방어 수단을 통해 저지해왔으며, 또한 자신에 대한 우상숭배를 통해 피해 가려 했던 것이기도 했다. 목적과 수단이 심연처럼 갈라져 있었다. 이제 중국은 그 심연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