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스트라우스

Leo Strauss (1939)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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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학자는 궁극적으로 단지 여론을, 정치적 여론을 넘어서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현실정치 그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 그는 현실정치의 근본적 목표는 현실정치로 달성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로지 사색에, 철학에 바친 삶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 〈정치철학이란 무엇인가?〉

스트라우스 관련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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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스트라우스가 강조하는 것은 구체적 방식과 질서보다는 ‘태도’다. 우리 현대인들은 선과 악이라는 문제에 얼마나 진지하게 접근하는가? “선? 민주주의가 선 아닌가?” “진보가 선 아닌가?” “불평등, 독재, 이런 게 악이겠지.” 이런 단순한 주장이라도 나오면 다행이고, 대부분은 그런 문제에 신경 쓸 의지도 여유도 없다는 태도일 것이다. 각자의 욕망을 좇아 각자에게 주어진 기능을 무심히 수행하며 보내는 하루하루, 그것은 최악의 경우 대중조작이 손쉬워짐으로써 파시즘과 같은 ‘악의 레짐(regime)’이 수립될 수 있게 만든다. 그 정도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선도 악도 뚜렷하지 않고 오직 돈만이, 이런 저런 숫자만이 말하는 세상은 사람의 영혼을 지치게 하고, 허무주의에 빠지게 한다. 그러므로 세상을 단순하게 살지 않는 사람, 미덕과 이상주의를 단지 학창 시절의 낭만으로 묻어두지 않는 사람, 최신 유행 지식의 소비자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행동 방침을 정하는 사람이 스트라우스가 권하는 ‘고대적’ 인간이다. 아테네의 찬란한 햇빛 속을 걸어다니면서도 끊임없이 정의와 덕의 문제, 그 햇빛 저편의 어둠을 고민했던 소크라테스와 같은 인간이다.
  • 확실한 것은 스트라우스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전하는 하나의 교훈이다. 그것은 ‘단순히 생각하지 마라’는 것이다. “지금 내가 믿고 있는 믿음이 과연 얼마나 확실한 것일까?” “이 책을 한번 읽어 보니 대강 이런 내용인 것 같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한 번만 더 읽어 보면 뭔가 다른 점이 발견되지 않을까?” 공부하는 사람에게나 일반인에게나, 스트라우스는 “한 번 더 생각해 보라”, “한 번만 더 읽어보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세상은, 학문은 그렇게 단칼에 해결해 버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주장을 단순히 “저런 표현을 쓰는 걸 보니 저쪽 동네 사람이로군”, “저 사람 출신을 보니 어디어디 쪽의 이익을 대변하는 거로군”하며 더 이상 들어보려고 하지도 않는 경박함에 대해 스트라우스의 신중한 태도는 엄정한 경고를 보내고 있다. 그런 신중함이 결국 책을 읽다 읽다 못해 권 수나 쪽 수까지 살피며 뭔가 의미를 찾아내 보려는 ‘밀교적 해석법’까지 낳았으리라. 분명 그러한 해석법을 누구에게나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오늘을 살아가며 스트라우스의 교훈을 지키는 일이 반드시 그의 방법을 그대로 따라야 함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