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1889–1951)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독일어: 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년 4월 26일 ~ 1951년 4월 29일)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삶을 보낸 철학자이다.

1910년대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 (1929)

출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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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
    • 《논리철학 논고》 (이영철 옮김), 1.1
  • 논리에서는 아무것도 우연적이지 않다: 사물이 사태 속에 나타날 수 있다면, 그 사태의 가능성은 사물 속에 이미 선결되어 있어야 한다.
    • 《논리철학 논고》 (이영철 옮김), 2.012
  •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독일어: Wovon man nicht sprechen kann, darüber muß man schweigen.
    • 《논리철학 논고》 (이영철 옮김), 7.
  • 한 낱말을 발화하는 것은 말하자면 표상(表象) 피아노에서 어떤 한 건반을 두드리는 것이다.
    • 《철학적 탐구》(이영철 옮김), § 6
  • 우리의 언어는 하나의 오래된 도시로서 간주될 수 있다. 즉 골목길들과 광장들, 오래된 집들과 새 집들, 그리고 상이한 시기에 증축된 부분들을 가진 집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미로; 그리고 이것을 둘러싼, 곧고 규칙적인 거리들과 획일적인 집들을 가진 다수의 새로운 변두리들.
    • 《철학적 탐구》(이영철 옮김), § 18
  •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에서 그것의 사용이다.
    • 《철학적 탐구》(이영철 옮김), § 43
  • 왜냐하면 당신이 그것들을 주시한다면, 당신은 그 모든 것에 공통적인 어떤 것을 볼 수는 없을 것이지만, 유사성들, 근친성들은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매우 많이. 이미 말했다시피: 생각하지 말고, 보라!
    • 《철학적 탐구》(이영철 옮김), § 66
  • 철학은 우리의 언어 수단에 의해 우리의 오성(悟性)에 걸린 마법에 대한 하나의 투쟁이다.
    • 《철학적 탐구》(이영철 옮김), § 109
  • 우리 언어의 형식들 속으로 수용된 비유가 잘못된 가상(假象)을 야기한다. 그리고 이 가상이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 《철학적 탐구》(이영철 옮김), § 112
  • 철학은 언어의 실제 사용을 어떤 방식으로도 침해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그러니까 그것을 결국 단지 기술할 수 있을 뿐이다.
    • 《철학적 탐구》(이영철 옮김), § 124
  •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물들의 측면들은 그것들의 단순성과 일상성으로 인하여 숨겨져 있다.
    • 《철학적 탐구》(이영철 옮김), § 129
  • 우리의 역설은, 하나의 규칙이 어떠한 행위 방식도 확정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어떤 행위 방식도 그 규칙과 일치하게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답은, 어떤 행위 방식도 그 규칙과 일치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또한 모순되게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여기에는 일치도 모순도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여기에 어떤 오해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러한 사고 과정에서 해석에 해석을 가한다―마치 각각의 한 해석이 우리의 이 해석 뒤에 또다시 놓여 있는 한 해석을 생각하기 전까지의 최소한 한순간은 우리를 진정시킨다는 듯이―는 점에서 이미 드러난다. 이를 통해 우리가 보여 주는 것은 요컨대, 하나의 해석이 아닌, 오히려 우리가 "규칙을 따른다"라고 부르는 것과 "규칙에 어긋나게 행위한다"라고 부르는 것 속에서 적용의 그때 그때 표현되는 규칙 파악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 《철학적 탐구》(이영철 옮김), § 201
  • 내가 규칙을 따를 때,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나는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른다.
    • 《철학적 탐구》(이영철 옮김), § 219
  • 철학에서 당신의 목적은 무엇인가?―파리에게 파리통에서 빠져나갈 출구를 보여주는 것.
    • 《철학적 탐구》(이영철 옮김), § 309
  • 언어놀이들이 변하면 개념들이 변화하며, 또 개념들과 더불어 낱말들의 의미들도 변화한다.
    • 《확실성에 관하여》 (이영철 역) 65.
  • 모든 것을 의심하려는 사람은 의심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의심하는 놀이 자체는 이미 확실성을 전제한다.
    • 《확실성에 관하여》 (이영철 역) 115.
  • 나폴레옹의 존재를 의심하고자 하는 것은 나에겐 우스꽝스럽게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150년 전의 지구의 존재를 의심한다면, 이제 그는 우리의 증거 체계 전체를 의심하고 있기 때문에, 아마도 나는 좀더 경청할 용의가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이 체계가 그 체계 내의 확실함보다 더 확실한 것처럼 여겨지지 않게 된다.
    • 《확실성에 관하여》 (이영철 역) 185.
  • 나는 어떤 철학자와 함께 정원에 앉아 있다. 그는 우리 근처에 있는 한 나무를 가리키면서 "나는 그것이 나무라는 것을 안다"고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한다. 제3의 인물이 다가와서는 그 말을 듣는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말한다: "이 사람은 돌지 않았다. 우리는 단지 철학하고 있을 뿐이다."
    • 《확실성에 관하여》 (이영철 역) 467.

출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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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산이라는 과정은 그저 직관을 일깨운다. 계산은 실험이 아니다.
  •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뜻한다.
  • 논리는 세계를 채운다: 세계의 한계는 또한 논리의 한계이다.
  • 말로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논리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다: 이러 이러한 것은 세계에 있으나 저런 것은 없다 이는 마치 우리가 어떤 특정한 가능성을 제외시키는 것을 전제로 할 수 있으며, 이것은 마땅한 경우라고 볼 수 없다. 즉 논리가 이 한계를 다른 측면에서 관찰해 본다면 논리는 세계의 한계를 벗어나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는 사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또한 말 할 수 없다.
  • 철학에서 당신의 목표가 무엇인가? 파리를 보기 위해 병 밖으로 꺼내는 방식.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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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의 경제학 교수인 스라파와 함께 《논고》의 사상에 대해 여러 번 토론을 했다. 하루는(내 생각엔 두 사람이 함께 기차를 타고 있었던 것 같다) 비트겐슈타인이 한 명제와 그것이 묘사하고 있는 것은 동일한 '논리적 형식', 동일한 '논리적 다양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스라파는 한 손의 손가락 끝으로 턱밑을 한번 바깥쪽으로 쓸고는(이것은 혐오나 경멸을 나타낼 때 나폴리 사람들이 흔히 쓰는 제스처이다) "그것의 논리적 형식은 뭡니까?"라고 물었다. 스라파가 든 예는 비트겐슈타인에게 한 명제와 그것이 기술하고 있는 것이 동일한 '형식'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 속에는 불합리한 점이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은 한 명제는 문자 그대로 그것이 기술하고 있는 실재에 대한 '그림'이어야 한다는 관념에서 그를 벗어나게 해주었다.
    • 노먼 맬컴, 《회상록》 (이윤 옮김)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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