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C. 스콧

미국의 인류학자 (1936–2024)

제임스 C. 스콧은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인류학자다.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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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리주의 국가가 (상업적) 나무만 보느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실제 숲을 보지 못한다면 그리고 삼림에 대한 공리주의의 관점이 추상적이고 부분적이라면, 그 자체로서는 그다지 독특한 건 아니다. 어느 정도의 추상화는 잠재적으로 모든 분석 형태에 필수적이며, 국가 관료에 의한 추상화가 그들 고용주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재정적 이해를 반영해야 한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 《국가처럼 보기》 (전상인 역)
  • 문제는 이런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 삼림, 즉 하나의 '상품기계'로서의 삼림이라는 것이 사실은 목재 생산의 극대화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는 점이었다. 이런 공리주의적 관점을 가장 극단적으로 몰아붙인 것이 프로이센이었다. 일찍부터 삼림관리에 대한 학문이 발달한 프로이센에서는 근대에 들어서면서 목재 산출을 극대화하기 위한 삼림 조성이 본격화된다. 곧고 질 좋은 목재로 유명한 노르웨이가문비 나무같은 한 종으로 삼림을 채워버리는 것이었다. 동일한 종, 동일한 수령으로 채워진 삼림은 마치 논이나 밭과 같이 관리해서 일정 주기로 목재를 얻는다는 것이 이런 발상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이는 본래의 의도와는 정 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 《국가처럼 보기》 (전상인 역)
  • 전문가와 관료에 대한 불만 속에서 “노동자는 점차 냉소적으로 변해 ‘관료가 우리를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둬’라고 말하게 된다.”(알렉산드라 콜론타이, 1921) 그 결과는 독단적이고 근시안적인 관료 집단이 노동자의 사기를 꺾어 작업 현장을 ‘불성실’하게 만드는 것이다.
    • 《국가처럼 보기》 (전상인 역)

관련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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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콧은 재앙의 원인이 네 가지 상이한 요소의 결합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첫째는 국가의 가독성(legible) 향상을 위한 단순화 작업이다. 근대 초기부터 국가는 그 통치 대상을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해 숲, 농토 등의 공간과 도시, 성(姓), 중량, 언어 등의 생활을 규격화, 정량화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때 자연과 인간생활이 수천 년간 만들어온 보이지 않는, 그러나 지속가능한 많은 질서는 무시되거나 제거의 대상이 된다. 두 번째는 19세기의 근대주의에 싹이 트고 20세기 초반에 완성된 하이 모더니즘의 열망이다. 이념적 좌우를 막론하고 20세기 초반을 휩쓴 이 열정은 산업화와 과학, 기술의 진보에 대한 신념에서 비롯되며, 국가는 과학적 지식의 권위를 통해 자연과 사회를 역사와 전통과 단절된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재편하려고 하였다. 이상의 두 가지는 근대 세계에 모든 국가를 휩쓴 현상으로 어디에서나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으나 지구 곳곳에 있는, 정방형으로 잘 짜인 시카고나 브라질리아 같은 계획도시들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위의 두 요소가 모든 근현대 국가들에서 보이는 공통분모라고 한다면 권위주의적 국가와 허약한 시민사회라는 상호 연결된 두 요소는 사회공학적 야망의 파탄을 필연으로 만든다. 국가가 과학적 법칙이라는 명분으로 사회를 과격하게 개조하려 할 때 시민사회는 저항을 통해 일상생활을 유지하였던 토착적이고 실천적인 지혜인 실행지(實行智), 또는 메티스(metis)를 지켜야 한다. 메티스라는 불명확한 개념을 스콧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준법투쟁’이라는 사례를 통해 명쾌하게 설명한다. 노동조합이 작업지침에 쓰인 대로만 직무를 수행하고 비공식적인 요령과 임기응변을 거부할 때 공장은 멈추고 교통은 마비되기에 이른다. 아무리 자동화와 현대화가 이루어진 곳이라 하여도 생산과 소비는 비공식적인 실행지가 없이는 유지될 수 없으며 이러한 실행지를 끊임없이 축적하고 진화시키는 공간은 국가가 아닌 사회인 것이다. 국가가 억압적이지 않고 시민사회가 강력하다면 행정가나 계획가들의 이상적, 비현실적인 계획들은 국가와 사회의 교섭을 통해 좌절되거나 현실적인 방향으로 개선될 것이다. 반면에 국가의 공상적인 계획들이 국가권력의 독점적 지위를 통해 맹목적으로 수행된다면 그 결과는 참담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