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16,145 바이트 추가됨 ,  3개월 전
편집 요약 없음
잔글
**{{llang|zh|凡是愚弱的國民,即使體格如何健全,如何茁壯,也只能做毫無意義的示眾的材料和看客,病死多少是不必以為不幸的}}
:: ''Call to Arms (1922년)''
== 《무덤》 ==
* 내 가증스러움은 종종 스스로도 느끼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술을 끊고 어간유를 먹는 것은 내 성명을 연장하기 위한 것이지만, 도리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대부분은 바로 나의 적―그들에게 좀 점잖게 말한다 해도 적일 뿐이다―을 위해 그들의 좋은 세상에다 얼마간 결함을 남겨 주려는 것이다. 군자의 무리들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왜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군벌을 욕하지 않느냐? 이 역시 비겁한 짓이다!" 그러나 나는 유인하여 죽이려는 이러한 수법에 넘어가고 싶지 않다. 목피도인이 "몇 년 동안 집안의 부드러운 칼로 목을 베니 죽음을 느끼지 못했다"라고 잘 말했듯이, 나는 오로지, 자칭 '총이 없는 계급'이라고 하지만 실은 부드러운 칼을 들고 있는 요괴들을 질책하려 한다.
** 〈제기〉(1926)
 
* 오늘날 세상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자연의 힘은 이미 인간의 명령을 따르며 조종당하고 있으니, 인간은 마치 말을 부리듯이 기계로써 제어하여 그것을 사용하고 있다. 교통수단은 바뀌어 이전 시대보다 편리하게 되었으며, 설령 고산대천이라 하더라도 장애가 되자 않는다.
*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않으면 도리어 개에게 물린다. 물에 빠진 개를 불쌍히 여기면 나중에 선량한 사람이 고생하게 된다.
** 〈과학사교편〉(1907)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
 
* 대개 과학의 발견이란 항상 초과학의 힘으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는데, 이를 쉬운 말로 표현하면 비과학적 이상의 감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유명한 학자들은 대체로 이러했다. 랑케는 "무엇이 인간을 도와 그에게 진정한 지식에 이르도록 했는가? 그것은 실제적인 것도 아니요, 지각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바로 이상이다"라고 했다. 이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삼을 만하다. 영국의 헉슬리는, 발견은 영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는 인간의 능력과는 무관하다고 했다. 이러한 영감이야말로 곧 진리의 발견자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영감이 있으면 중간 정도의 재능을 가진 자라도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으며, 이러한 영감이 없으면 비록 천재의 재능을 가진 자라도, 사업은 끝내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말 것이라 했다. 이러한 지적은 대단히 심각하고 절실하여 경청할 만하다.
** 〈과학사교편〉(1907)
 
* 다만 가볍게 볼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사회가 편향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점이다. 나날이 한 극단으로 내달리면 정신은 점차 소실되고 곧 파멸이 뒤따를 것이다. 온 세상이 오로지 지식만을 숭상한다면 인생은 틀림없이 무미건조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오래가면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과 명민한 사상은 소실되어, 이른바 과학도 마찬가지로 없어지고 말 것이다.
** 〈과학사교편〉(1907)
 
* 그렇지만 구미의 열강이 모두 물질과 다수로써 세계에 빛을 드리우고 있는 것은 그 근저에 인간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물질이나 다수는 다만 말단적인 현상일 뿐이며, 근원은 깊어 통찰하기 어렵고 화려한 꽃은 드러나게 마련이어서 쉽게 눈에 띄는 법이다. 이 떄문에 천지 사이에서 살아가면서 열강과 가축을 벌이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확립하는 일이다. 사람이 확립된 이후에는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 사람을 확립하게 위한 방법으로는 반드시 개성을 존중하고 정신을 발양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는 데에는 한 세대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중국은 예로부터 본래 물질을 숭상하고 천재를 멸시해 왔으므로 선왕의 은택은 나날이 없어지고 외부의 압력을 받게 되면서 마침내 무기력해져 자기조차 보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하찮은 재주를 가진 교활한 무리들이 크게 부르짖고 과장하면서 물질로써 말살하고 다수로써 구속하여 개인의 개성을 남김없이 박탈하고 있다. 과거에는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생긴 반신불수였고, 지금은 왕래를 통해 전해진 새로운 질병을 얻게 되었으니, 이 두 가지 질병이 교대로 뽐내면서 중국의 침몰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아아,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니 더 지속할 수가 없구나!
** 〈문화편향론〉(1907)
 
* 이제 중국에서 찾아보아, 정신계의 전사라고 할 만한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지극히 진실한 소리를 내어 우리를 훌륭하고 강건한 데로 이끌 사람이 있는가? 가정과 나라가 황폐해졌지만 최후의 애가를 지어 천하에 호소하고 후손에게 물려 줄 예레미아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런 사람이 태어나지 않았거나 아니면 태어났지만 군중에게 살해되었을 텐데, 그중 한 경우이거나 두 경우 다이기 때문에 중국은 마침내 적막해졌다.
** 〈마라시력설〉(1907)
 
* 우리는 지나간 사람들을 추도한 뒤에 자기나 다른 사람이나 모두 순결하고 총명하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갈 것을 빌어야 한다. 허위의 가면을 벗어 버리고 자기와 남을 해치는 세상의 몽매와 폭력을 제거할 것을 빌어야 한다.<br>우리는 지나간 사람들을 추도한 뒤에 인생에 조금도 의의가 없는 고통을 제거할 것을 빌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만들어 내고 감상하는 몽매와 폭력을 제거할 것을 빌어야 한다.<br>우리는 또 인간은 다 정당한 행복을 누리게 해야 한다고 빌어야 한다.
** 〈나의 절열관〉(1918)
 
* 종합하면, 각성한 부모는 전적으로 의무를 다하고, 이타적·희생적이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란 쉽지 않고, 중국에서는 더더욱 쉽지 않다. 중국의 각성한 사람들이 어른에게 순종하고 어린 사람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한편으로 낡은 것들을 청산하고 한편으로 새 길을 개척해야 한다. 바로 처음에 말한 바와 같이 "스스로 인습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암흑의 수문을 어깨로 걸머지어 그들을 넓고 밝은 곳으로 놓아주면서 그후 그들이 행복하게 살아가고 도리에 맞게 사람 노릇을 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대단히 위대하고 긴요한 일이며 또 대단히 어렵고 지난한 일이다.
** 〈지금 우리는 아버지 노릇을 어떻게 할 것인가〉 (1919)
 
* 그래서 노라를 위해 헤아려 볼 때, 돈이―고상하게 말하면 바로 경제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자유는 물론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돈 때문에 팔아 버릴 수도 있습니다. 인류에게는 한 가지 큰 결점이 있는데, 바로 항상 배고프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꼭두각시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오늘날 사회에서 경제권은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 〈노라는 떠난 후 어떻게 되었는가?〉 (1923)
 
*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제군들은, 성각건대 십중팔구는 천재의 탄생을 바랄 것입니다. 그렇지만 상황은 이러하여, 천재가 태어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천재를 배양하는 흙이 마련되기도 어렵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천재는 대부분 천부적인 것입니다만, 모두들 천재를 배양하는 흙이 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흙이 되는 역할은 천재를 바라는 것보다 더욱 절실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많은 천재가 있다고 하더라도 흙이 없어 잘 자랄 수 없게 되어 마치 접시에 담은 녹두 콩의 싹과 같아질 것입니다.<br>흙이 되려면 정신을 확대해야 합니다. 바로 새로운 조류를 받아들이고 낡은 외투를 벗어던져야 장래에 태어날 천재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작은 일 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창작할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창작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번역하고, 소개하고, 감상하고, 읽고, 보고, 심심풀이하는 것도 다 좋습니다. 문예를 가지고 심심풀이한다는 것은, 말하고 보니 다소 우스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천재에게 상처를 주는 것보다야 낫습니다.<br>흙은 천재에 비하여 당연히 보잘것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려움을 잘 참아 내지 않으면 흙이 되기도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이란 사람이 하기에 달렸으니 공연히 천부적인 천재를 기다리는 것보다야 확실함이 있습니다. 이 점이 흙의 위대한 점이며 도리어 큰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점입니다. 또한 보답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꽃은 흙으로부터 나오는데, 보는 사람이 즐겁게 감상하는 것은 물론이요, 흙 자신도 즐겁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꼭 자신이 꽃이 되어야 마음이 흐뭇해지는 것은 아닙니다.―이는 흙도 영혼이 있다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 〈천재가 없다고 하기 전에〉 (1924)
 
* 공로 선생은 "자기만 못한 사람을 벗 삼지 말라"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사실 세력과 이익을 따지는 이러한 안목은 오늘날 세상에도 아주 흔하다. 우리 스스로가 본국의 꼴을 살펴보면 벗이 있을 리 없음을 알게 된다.
** 〈잡다한 추억〉 (1925)
 
* 나는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쌓여 있는 원한과 분노가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강자에게서 유린을 당하여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강자에게는 반항하지 않고 도리어 약자 쪽에 발산한다. 군인과 비적은 서로 싸우지 않고 총이 없는 백성만이 군인과 비적으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최근 쉽게 볼 수 있는 증거이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이는 이들의 비겁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비겁한 사람은 설령 만 장 높이의 분노의 불길이 있다 해도 연약한 풀 이외에 더 무엇을 태울 수 있겠는가?
** 〈잡다한 추억〉 (1925)
 
* 중국인들은 여러 가지 면을 대담하게 정시하지 못하고 감춤과 속임을 가지고 기묘한 도피로를 만들어 내었는데, 스스로는 바른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 길 위에 있다는 것이 바로 국민성의 비겁함, 나태함, 교활함을 증명하고 있다.
** 〈눈을 크게 뜨고 볼 것에 대하여〉 (1925)
 
* 듣자 하니, 용감한 권법가는 이미 땅에 쓰러진 적수를 절대 더 이상 때리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참으로 우리가 모범으로 받들 만하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을 더 부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적수도 용감한 투사라야 하는데, 일단 패배한 후에는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며 더 이상 달려들지 않거나 당당하게 나와 상대에게 복수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물론 안 될 것이 없다. 그러나 개의 경우, 이를 끌어다 예로 삼으면서 대등한 적수로 동등하게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개가 아무리 미친 듯이 짖어 대더라도 사실 개는 '도의' 같은 것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 페어플레이는'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 (1925)
 
* 요컨대, 물에 빠진 개를 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첫째로 그놈이 언덕으로 기어 올라온 다음의 태도를 보아야 한다.<br>개의 본성은 어쨌든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가령 일만 년 후라 하더라도 아마 지금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말하려는 것은 지금이다. 만약 물에 빠진 뒤에 아주 불쌍하게 여긴다고 하면 사람을 해치는 동물 가운데 불쌍한 것은 참으로 많다. 콜레라 병균만 하더라도 비록 빠르게 번식하지만 그 성격은 오히려 얼마나 온순한가. 그렇지만 의사들은 결코 그놈을 놓아두지 않는다.
**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 (1925)
 
* 속암에 "충직하고 온후한 것은 쓸모가 없다는 것의 다른 이름이다"라는 것이 있는데, 조금은 너무 냉혹한지 모르겠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히려 사람들에게 나쁜 짓을 하라고 부추기는 말이 아니라 수많은 고초의 경험을 귀납한 후에 나온 경구라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않는다는 설을 보면, 그것이 만들어진 원인은 대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때릴 힘이 없는 경우이고, 둘째는 비교를 잘못한 경우이다. 전자는 잠시 논외로 하고, 후자의 큰 잘못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거덜 난 인물을 물에 빠진 개와 같이 보는 잘못을 범하는 경우이고, 둘째는 거덜 난 인물이 좋은지 나쁜지 분간하지 못하고 일률적으로 동일시하여 그 결과 도리어 악을 방임하게 되는 경우이다. 즉, 오늘날을 두고 말하면 정국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참으로 굴러가는 바퀴처럼 이쪽이 일어나면 저쪽이 넘어지는 꼴이어서 나쁜 사람은 빙산에 기대어 거리낌 없이 나쁜 짓을 자행하고, 일단 실족하면 갑자기 동정을 구걸한다. 그러면 남이 물리는 것을 직접 보았거나 직접 물림을 당한 어리숙한 사람은 어느덧 그를 '물에 빠진 개'로 보면서 때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가엾다는 생각을 가지고, 정당한 도리가 이미 실현되었으니 이때야말로 의협은 바야흐로 내 손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그놈은 진짜 물에 빠지지 않았으며, 소굴은 이미 잘 만들어 놓았고, 식량은 벌써 충분히 저장해 두었으며, 게다가 그것들을 다 조계에 해두었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 비록 이따금 부상을 당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아 기껏해야 절룩거리는 시늉을 하여 잠시 사람들의 측은지심을 불러일으켜 조용히 피해 숨으려는 것뿐이다. 다른 날 다시 나타나서 예전처럼 먼저 어리숙한 사람을 무는 일부터 시작하여 "돌을 던져 우물에 빠뜨리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 그 원인을 찾아보면 부분적으로는 바로 어리숙한 사람이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좀 가혹하게 말한다면 역시 스스로가 판 무덤에 스스로 빠진 격이니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이다.
**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 (1925)
 
* 어진 사람들은 혹시,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페어플레이'를 해서는 안 되는가라고 물을지 모르겠다. 나는 즉각, 물론 해야 하는데 그렇지만 아직은 이르다고 대답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자네는 독 안에 들어가게"라는 방법이다. 어진 사람들은 꼭 이 방법을 쓰려고 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그래도 그것이 일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토신사 또는 양신사들은 늘 중국은 특별한 나라 사정이 있어 외국의 평등이니 자유니 하는 등등의 것을 적용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이 '페어플레이'도 그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당신에게 '페어'하지 않는데 당신이 오히려 그에게 '페어'하여 그 결과 도무지 자기만 손해를 보게 된다. '페어'하려 해도 그렇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페어'하지 않으려 해도 그것마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래서 '페어'하려면 가장 좋은 것은 우선 상대를 잘 보는 것이다. 만약 '페어'를 받아들일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면 전혀 예를 갖추지 않아도 된다. 그놈도 '페어'하게 되었을 때, 그때 가서 다시 그놈과 '페어'를 따져도 늦지 않다.
**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 (1925)
 
=== 아큐정전 ===

편집

1,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