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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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파벌이 폭력을 사용하고 잔혹행위를 저질렀지만 그 중에서 가장 살벌한 잔혹행위와 가장 큰 인명희생은 인민해방군이 1968년 여름 급진적인 홍위병 조직과 노동자 조직을 전면적으로 억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1980년 사인방에 대한 기소장은 이 비극을 극좌분자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사실상 사망자의 대다수가 지방 군부대에 학살된 급진적인 홍위병들이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br>문화대혁명 동안 지식인이 겪은 고난은 소름끼칠 정도로 (외국에서)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는 반면, 인민해방군에 의해 자행된 대량학살은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 시대의 잔혹행위를, 대중 소설에서 잘 나타나듯이 급진적 마오주의자들 책임으로 모호하게 돌리고 있다. 그러나 급진적 마오주의자들은 지식인 못지않게 마오쩌둥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의 희생자들이었다. 그 수로 따지자면 전자가 후자보다 더 많은 희생을 치렀다.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 종국적으로 마오는 사회주의의 건설자로서보다는 경제적 근대화를 이룩한 사람으로서 더 성공적이었다. 마오주의의 경제적 유산을 비판하는 글들은 대개 업적보다는 결점에 더 주목하고 있지만, 마오쩌둥 시대에 공업총생산은 38배, 중공업생산은 90배 늘었다. 그것도 아주 미약한 근대적 공업기반에서, 그 생산마저 외세의 침략과 내전의 피해로 절반이나 감소한 상태에서 시작해 그런 결과를 낳았다. 마오쩌둥 시대 전체를 보면 중국의 순생산에서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23%에서 50%로 증가했고 농업 비중은 58%에서 34%로 감소했다.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