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민주정치’의 목적을 재설정할 필요가 있다. 초점을 ‘심의’와 ‘참여’라는 추상적 이상으로부터 책임성을 확보할 수 있는 구체적 제도로 전환해야 한다. 엄밀하게 말해 ‘심의’와 ‘참여’는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심의’는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집단적 의사를 결정하는 방식이고, ‘참여’는 권력을 견제하고 다수의 의지를 확인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종합하면, 마키아벨리의‘혁명적 참주’에 대한 천착이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에 내재한‘비지배적’리더 십의 정치적 표현을 지나치게 잠식했다면, 마키아벨리에 대한‘민중주의적’해석은 정치사회적 갈등을 긍정 적으로 바라보는 제도적 구상과 이러한 제도를 수립하는 정치 지도자에 대한 교육을 무리하게 일치시켰다는 것이다. 비록 두 가지 해석 모두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겠지만, ‘비(非)지배’를 목적으로 한 리더십에 대한 침묵은 그의 저술이 특정한 대상들을 염두에 두고 기술되었다는 엄연한 사실을 왜곡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군주』에 기술된 마키아벨리의 비(非)지배를 목적으로 하는 리더십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통해 기존의 민주적 리더십 연구를 보완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첫째, ‘비(非)지배 자유’에 기초한 민 주적 리더십을 민주주의의 자기 개혁적 운동성이 비민주적 결말로 귀결되는 것을 막을 방법의 하나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부정의(injustice)의 경험으로 형성되는‘반감’과‘연민’에서 출발하는 급진적 민주주의의 민주적 연대에서는 집단 사이의 적대감을 해소할 내재적 규범을 찾을 수 없다. 반면 마키아벨리가 제시하는 ‘타인의 자의적 의지로부터의 자유’는 하나의‘공유된 정의감’으로서 민주적 열망을 수용함과 동시에 비민주 적 또는 반민주적 결말을 막을 수 있는 내재적 원칙이 될 수 있다. 둘째, 모든 갈등을 힘의 논리로 이해하는 비관적 현실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판단기준을 제시할 수 있을 것 이다. 급진적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의 자기 개혁적 속성을 지속시키는 힘은 개개인이 일상에서 느끼는 부정의와 결부되어 있다. 그 결과 민주적 연대를 가능하도록 하는 분개가 집단 사이의 충돌로 발전되었을 때, 급진적 민주주의 이론가들은 민주주의 사회 내부의 갈등이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귀착되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또한 거듭된 쟁투의 비민주적 결말이 민주주의에 대한 실망을 초래했을 때, 힘의 논리에 기초한 비관적 현실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 방향성도 없다. 마키아벨리가 성공적 리더십의 기준으로 제시하는 ‘비(非)지배 자유’는 민주주의의 불확정성이 갖는 자기 개혁적 추동력을 소멸시키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민 주적 심의에 대한 확신을 유지시킬 수 있는 리더십의 하나로 발전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아울러‘비(非)지배 자유’에 기초한 민주적 리더십은 급진적 민주주의 이론에서 발견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실망의 고리를 끊어 민주적 심의가 힘겨루기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그는 기독교인들과는 달리 역사를 신의 뜻이 관찰되는 계시의 실현 과정, 즉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의 연속으로 바라볼 마음이 없다. 그에게 역사는 하나의 방향만 정해진, 그것도 인간의 의사와는 독립된 의지의 결과가 아니다. 그는 역사를 올망졸망한 인간의 일상, 환희와 절망의 영웅적 행동, 그리고 욕망과 열정이 만들어 내는 정치사회적 사건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만 진정 '앎(eidenai)'의 지평이 넓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키아벨리의 로마공화정은 '조화' 대신 '갈등'에 기초한다. 인민은 눈을 부라리며 귀족의 전횡과 권력의 비리를 견제하고, 귀족은 연줄과 배경을 뒤로하고 인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한다.
마키아벨리가 가졌던 모든 생각이 피렌체가 당면했던 시대적 요구를 통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그가 용인했던 제국적 팽창은 그가 내세웠던 '비(非)지배'와의 길항을 결코 해소하지 못한다. '악의 교사'라는 비난으로부터는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겠지만, 애국심을 단지 집단적 이기심의 발현으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다.
지금 한국 사회는 정치철학의 빈곤과 정치적 상상력의 부재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정치적 현상에 대해 이념적이고 규범적인 판단부터 하고 보는 습관 때문이다. [...] 둘째는 '힘의 철학'에 의해 잠식된 우리의 지적 호기심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그 어느 사회보다 권력을 맹목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마키아벨리의 '비(非)지배'는 '해방적'이지만 '무정부적'이지 않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마키아벨리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악마의 분장을 한 모사꾼으로부터,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며 말을 달리던 애국자까지, 그의 얼굴은 참으로 여러 모습으로 우리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그의 몸통을 보지 못할 때가 많다.
마키아벨리는 당시 지식인들이 읊조리던 키케로의 공화주의에 반발한다. 특히 키케로가 '공화'의 제도적 실현으로 제시했던 '혼합정체'가 과연 기능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다. [...] 마키아벨리에게 이런 키케로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린 사람이었다. [...] 동일한 맥락에서, 마키아벨리는 리비우스(Livius)에 대해서도 불만을 드러낸다.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는 '온정(caritas)'이 아니라 '비(非)지배'에 대한 열망(passione)에 기초한다. 따라서 동료에 대한 애정이 개별 공동체를 넘어서서 보편 인류에 대한 애정으로 전환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그가 초점을 맞추던 사안이 아니다. 공존보다 팽창을 꿈꾸던 공화주의자에게 이러한 주제는 부차적이다.
마키아벨리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상당부분 일리가 있는 것들이다. 혹자는 마키아벨리의 정치적 현실주의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일축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사악함’에 대한 냉철한 분석에 그쳤다면, 인간을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보는 기독교 윤리관에서 마키아벨리의 충고가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 마키아벨리에게서는 ‘폭력’과 ‘공포’가 정치의 본질로 자리를 잡고, ‘기만’과 ‘눈가림’까지 용인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기에 마키아벨리가 지금까지 받아왔던 악평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폄하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