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대한민국의 문학가 (1892–1950)

이광수(李光洙,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 1950년 10월 25일)는 조선,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 사상가, 문학가, 시인, 평론가, 번역가이다. 2.8 독립 선언에 참여한 뒤 상하이로 건너가 신한청년당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임정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을 운영하였다. 1922년 질병과 임정의 내분으로 귀국 후,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언론에 종사하였고 민족 개조론, 민족적 경륜으로 심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뒤 수양동맹회와 수양동우회, 흥사단 원동지부의 결성을 주관했고,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 변절하여 총독부에 협력하였다. 해방 후 1950년 6.25 전쟁때 납북되었다.

이광수

어록 편집

  • 그의 느리고 부지런함, 그의 유순함. 그러면서도 일생에 한두 번 노할 때에는 그 우렁찬 영각, 횃불 같은 눈으로 뿔이 꺾이도록 맥진(驀進)함, 그의 침묵함...[1]
    ─ 수필 《우덕송》(牛德頌)의 일부
  • 아이들에게도 순순히 끌려가는 모습이 예수와 닮아 거룩해 보이기도 하다.[2]
  • 조선인은 허위(虛僞)되고, 공상과 공론만 즐겨 나태하고, 서로 신의와 충성심이 없고 술수를 부리며, 임사(매사)에 용기가 없고, 이기적이어서 사회봉사심과 단결력이 없고, 극히 빈궁하고.[3]
  • 일반 민중이 도덕적 이상이 퇴폐해서 인생의 의무라든가 사업이라든가 하는 높은 희구를 버리고 오직 성욕과 호기심만 따르게 되니, 에로란 성욕적 흥미를 만족시키는 관념군이요 그로란 호기벽을 만족시킬 만한 관념군.[4]
  • 주정 잘하기로 첫째가 아라사(俄羅斯), 둘째가 일본, 셋째가 조선사람[5]
  • (3.1 만세 운동은) 무지몽매한 야만인종이 지각없이 (남들이 하자 하니까) 따라서 한 것[3]
  • 우리 조선 민족이 혈통적으로, 문화적으로 대단히 단일한 민족이라는 것은 우리 조선인 된 이는 누구나 분명히 의식하여 일점의 의심도 없는 바다.[6]
  • 식민지하에서의 모든 활동은 비정치적이어야 한다.
  • 작가의 자존심은 죄다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독자 본위로 써 달라.[7]
    ─ 작가 김동인이 동아일보에 ‘젊은 그들’을 쓸 때
  • 일종의 극적 광경이라고나 할까. 황국을 위해 전장에 나가 죽자는 생각이 모두의 얼굴에 드러났더군요.[8]
    ─ 도쿄에서 발행된 잡지 ‘조선화보’(1944년 1월호)에서 아동문학가 마해송의 사회로 진행된 육당과 춘원의 대담 중에서
  • 조국을 위해 친일했다.[9]
  • 보통 사람이란 자신보다 만만한 자에게는 한없이 잔인하고 비열해지는 인간이 보통 사람이다.
  • 사찰의 개왓장마다 찬 땀이 흐를 일[10]
  • "국가의 생명과 나의 생명과는 그 운명을 같이하는 줄을 깨달았노라… 나는 이름만일 망정 극단의 크리스천으로, 대동주의자로, 허무주의자로, 본능만족주의자로 드디어 애국주의에 정박하였노라.[11]"
  •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만든 사회가 올바르게 운영될수 있을까?
  • 방 한가운데 놓인 토스트 브레드, 우유, 삶은 달걀, 과일, 냉수, 커피 등속이 다 상등제 기명에 담겨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12]
    ─ 소설 《흙》에서 1930년대 모던 보이들의 생활상 묘사
  • 근년에 조선에 유행되는 가요는…'부어라 먹자 두들겨라'식이 아니면 주색의 방종한 향락을, 검열관이 허하는 한에서 고취하는가 십흔 것들…[13]
  • "얼마 후에 결국 한국의 토지는 뜨거운 모래가 막막한 사막이 되어 푸른 언덕은 공허한 역사적 이름이 되어 후대의 사람들의 호기심만을 움직일 뿐이게 될 것이나이다. 조선 민족의 생사는 한산의 초목과 그 생사흥망을 같이해야 함에 있을진저.[14]"
1910년 3월 24일 경부선에서
  • "이것을 쓰는 것은 가이타시(海田市)와 히로시마(廣島)의 사이이다. 하늘은 활짝 개어 있고 뜨거운 해는 여름처럼 차장에 쨍쨍 부딪힌다.[14]"
1910년 3월 23일 오후 세시 차안에서
  • 저 ‘화랑’의 사상이란 오늘날 막 바로 부활시켜도 좋다고 생각합니다.[8]
    ─ 도쿄에서 발행된 잡지 ‘조선화보’(1944년 1월호)에서 아동문학가 마해송의 사회로 진행된 육당과 춘원의 대담 중에서
  • 이렇게 혼자 건넌방에 앉아서 당신께 편지를 쓰는 것이 나의 유일한 행복이외다. ...(중략)... 이곳은 다 잘 지내니 안심하고 즐겁게 공부하시오. (중략) 공부하는 중이니 저금 아니해도 좋소, 학비가 곧 저금이요.[15]
    ─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부인에게 보낸 편지
  • "세말이 되면 진고개와 종로에서 장, 단스 같은 것을 일등상으로 걸어놓고 경품부 대매출을 한다. 그때마다 안해는 장이 빠지기를 바라고 물건을 삿다. 그러나 뽑는 것마다 타울수건, 화저까락 따위요, 바라는 장은 아니 빠졌다.[16]"
자개장 당첨을 꿈꾸며 물건을 사들이는 아내 모습을 묘사하면서
  • "(고구마 꽃은) 백 년에 한 번 볼 수 있는 꽃[17]"


  • "멀리서 희미하게 안개 낀 한산(韓山)이 눈에 들어왔을 때의 나의 심정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무언가, 한산에는 태양의 빛도, 우주에 가득 차 흐르는 태양의 광선도 여기 한산에는 비추지 않는 모양이다.[14]"
- 1910년 3월 24일 부산역에서
  • "히로시마의 활짝 갠 하늘과 뜨거운 태양이 일본 풍경의 주된 색조를 이루고 있다면 조국 조선은 "태양의 빛도, 우주에 가득 차 흐르는 태양의 광선도 비추지 않는" 검은색의 풍경이다.[14]"
  • "일어나라, 우리 소년 제군![14]"
  • "오늘은 부산진의 장날에서 많은 백의(白衣)의 우리나라 사람(國人)이 소를 찾아 모여든 걸 목격했소이다. 백의를 입고는 있었으나 마음은 희지 않은 듯 보였소이다. 또한 특별하다 느낀 것은 소와 우리나라 사람에 대해서외다. 다른 것이 아니라 소는 용케 그 나라 사람의 상태, 성질(모두 오늘날의)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외다. 바꿔 말하면 소는 우리나라 사람의 심볼이라고 생각되어 정이 떨어지는 (情なき) 차제이오. 오호라, 소의 심볼을 버리고 호랑이의 심볼을 얻음은 언제의 일이런가! 일어나라, 우리 소년 제군! 한산(韓山)은 늙어서 그 푸름이 황모(黃毛)로 바뀌고 황모마저도 벗겨져 얼마 남지 않았으니, 수천의 한산이 완전한 붉은 사막이 되어 버렸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소이다.[14]"
1910년 3월 24일 경부선에서
  • "소년제군이여, 이것을 듣고 어떠한 느낌을 일어나느뇨. 천제(天帝)께서 인생(人生)을 만들 때에 동등하게 두 눈, 두 손, 두 다리를 내려 주신 것이 아닌가. 어떠한 부족함이 있어서 저들 왜국(倭國)에 의해 압제(壓制)를 받는 것인가. 이목구비를 갖춘 신한소년 제군은 이것을 생각하여 세월을 헛되이 하지 말고 자기의 목적과 자기의 천재를 발휘하여 그 목적지를 향해 서둘러라, 신한(新韓)을 어깨에 짊어질 대한 소년들이여[14]"


  • "세상에 백두산만한 명산도 없지만, 백두산만큼 매몰된 명산도 없습니다. ...(이하 중략)... 무엇보다 그 주인인 조선인에게 가장 심하게 백두산이 대접받지 못함이 가장 애닯습니다. 백두산이란 이름을 모르는 이야 없겠지만 또 백두산이 우리 민족에게 소중한 산인 줄 모르는 이야 없겠지만 한 걸음 나아가 백두산의 국토적 성질, 민족적 관계, 자연 및 인문상 실제적 사정에 대하여 묻는다면 우리가 가진 지식이 너무 작고 부족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하 중략)... 알아야 할 까닭조차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알고자 하는 노력도 있을 까닭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하 중략)... 그러나 백두산을 우리가 이렇게 알아야 옳으며, 또 이렇게 알아도 그만이리까?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18]"
1936년 '계명', '백두산' 정상 등반 소감
  • "체격이 팔다리나 몸통이 자로 잰 듯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게 바로 맞고, 몸 쓰는 것, 걷는 것 등 모든 동작이 날씬하여 남의 눈에 조금도 거슬리게 보이지 않고... (이하 중략)... 또 취미와 그 정신이 아울러 고상하다면 그야말로 내가 찾는 미인이 될 것[19]"
  • "얼굴은 둥글둥글한 타원형의 윤곽에다가 눈은 어디까지든지 크고 처진 듯하며 코나 귀가 복스럽게 예쁘고 살결이 하얀 분[19]"
  • "아랫목에 '뜻뜻이' 등을 굽고 있는 생활은 암만 해도 투쟁보다도 은둔을 의미한다.[20]"
1934년 조선일보에 실은 글에서
  • 우리 민족이 살 수 있는 길은 '독립을 포기하는 것'이며 모두 일본국민이 될 것[21]
  • "일제의 한반도 지배가 36년 만에 끝나지 않고 100년 이상 계속될 줄 알았다.[22]"
  • "설산은 호 그대로 개방적이요, 결백하고 어린애와 같이 표리가 없는 사람"
- 1947년 12월 8일 설단 장덕수 장례식에서 낭송한 추도사 중에서
  • "창파에는 명월이요, 청산에는 청풍이라.[23]"
  • "나에게 아무 것도 베푼 게 없는 조국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았건만 돌아온 것은 민족의 변절자라는 비난뿐[24]"

외부 링크 편집

각주 편집

 
위키백과
위키백과에 이 글과 관련된 자료가 있습니다.
  1. [만물상] 새해 조선일보2008. 12.31
  2. 암소 꼬리 뻗쳐지면 '우박' 날씨 아는 소처럼 우리도…
  3. 3.0 3.1 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305
  4. [조선일보에 비친 '신문화의 탄생'] [70] '에로·그로·넌센스'의 1930년대 조선일보 2012.09.04
  5. [만물상]주사(酒邪)파 척결 조선일보 2004.10.27
  6. '한국인 단일민족설'의 기원은? 조선일보 2010.05.26
  7. [만물상] 신문 연재소설 조선일보
  8. 8.0 8.1 “화랑 사상 지금 부활해도 좋을듯…”
  9. 친일과 애국 사이… 춘원의 두얼굴 조선일보 2000.01.10
  10. 절에서 술판 벌인 '新풍류남녀' 조선일보 2012.10.24
  11. 한국 근대 100년을 바라보는 시각들 조선일보 2009.02.26
  12. 요리를 통해 세상을 만난 두 여자 조선일보 2009.07.23
  13. [조선일보에 비친 ‘신문화의 탄생’ ] [10] 축음기와 레코드가 몰고 온 '유행가 범람시대' 조선일보 2012.02.06
  14. 14.0 14.1 14.2 14.3 14.4 14.5 14.6 이광수 18살 때 쓴 미공개 여행기 찾았다 동아일보 2012.07.18
  15. 박완서 등 문인의 마음을 훔쳐보다 조선일보 2011.02.21
  16. [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 [65] "금시계·자개장 뽑자" 경품 행사장에 사람들 몰려 조선일보 2011.10.03
  17. [지상 식물원] 나팔꽃을 닮았네 '고구마 꽃' 조선일보 2009.07.31
  18. 1935년, 동계 백두산에 처음 오른 일본인들 이야기
  19. 19.0 19.1 [인문사회]‘미인 권하는 사회’… 몸에 집착하는 한국인 동아일보 2011.03.05
  20. 뜨끈한 온돌서 조선문화가 태어났다 동아일보 2010.12.04
  21. 끝나지 않은 이광수의 친일행적 논란
  22. 예측과 예언 조선일보 2009.02.26
  23. 해운대서 송정까지...절경과 먹거리의 조화 조선일보 2000.10.11
  24. [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 근대적 욕망의 윤리적 파멸… 삼국유사와 조우하다 동아일보 2012.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