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
1960년 4월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제2공화국 출범으로 이어진 대한민국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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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어록
편집- 친애하는 고대 학생 제군! 한마디로 대학은 반항과 자유의 표상이다. 이제 질식할 듯한 기성독재의 최후적 발악은 바야흐로 전체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기에 역사의 생생한 증언자적 사명을 띤 우리들 청년학도는 이 이상 역류하는 피의 분노의 억제할 수 없다. 만약 이와 같은 극단의 악덕과 패륜을 포용하고 있는 이 탁류의 역사를 정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후세의 영원한 저주를 면치 못하리라.
- 4·18 고려대학생 선언문
- 학생(學生)의 피에 보답하라.
- 사실, 모든 민중혁명론자들은 4·19를 주도한 학생들이 그 낭만성 때문에 또 사회의 총체적 변혁의 요청을 외면하여 민중혁명을 달성하지 못했음은 물론 그것을 시도하지 않은 점을 인정하고 있다.…이러한 논리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이용된 방편이 혁명이라는 단어 앞에 각종의 제한적 수식어를 붙이는 일이다. 대표적인 것이 '대리 혁명'과 '미완의 혁명'이다. 둘 다 과학적 용어는 아니다.
- 김영명, 《한국현대정치사: 정치변동의 역학》, p. 218-219
-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 우리들은 하늘을 봤다.
1960년 4월
역사를 짓눌던, 검은 구름장을 찢고
영원의 얼굴을 보았다.- 신동엽, 〈금강(錦江)〉
- 이승만은 앞으로 모든 정당관계에서 벗어나 대통령직에 전념할 것을 밝혔다. 즉 이 단계에서 이승만은 모든 책임을 자유당과 이기붕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초당적인 국민의 지도자로 남음으로써 권력의 유지를 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상 이것은 이승만이 쓸 수 있는 마지막 카드였다. 자신의 친위대인 자유당을 버림으로써 그는 민중의 지지를 상실한 권력자가 보일 수 있는 가장 추악한 모습을 보였다.
- 오유석, 〈4월 혁명과 피의 화요일〉, 이병천·조현연 편, 《20세기 한국의 야만: 평화와 인권의 21세기를 위하여》 (2001)
- 마치 시가전을 치르고 난 전장터 같았다. 학생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쓰러져 있고 부상 학생들은 몸을 꿈틀대고 있었다. 그런데 부상 학생이 쓰러져 있는 바로 근처에서는 4, 5명의 경철관이 부상자 쪽은 본체만체 하고 조그만 발발이 개를 앞에 놓고 개의 목에 감긴 끈을 열심히 풀고 있었다. 이 발발이 개는 이 대통령이 아끼는 개인데 아마 총소리에 놀라 경무대 밖으로 뛰어나온 것 같았다.
- 이명동의 발언; 심재택, 〈4월 혁명의 전개과정〉, 한완상·이우재·심재택 외, 《4·19 혁명론 I》 (1983)에 인용됨.
- 나 리승만은 국회의 결의를 존중하여 대통령의 직을 사임하고 물러앉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의 여생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바치고자 하는 바이다.
- 이승만, 사임서
- 이승만의 시대는 서서히 끝이 나고 있었습니다. 그의 역사적 역할은 "나라세우기"의 기틀을 잡는 것으로 충분하였습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로 나라의 기틀을 잡았던 것만으로도 그의 공적은 태산과 같습니다. 그 기틀 위에서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을은 그 일에 적합한 의지와 능력을 갖춘 새로운 지도자를 요구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4·19 와 5·16 을 경과한 개발시대의 역사가 되겠지요.
- 이영훈, 《대한민국 이야기》
- 민주당에서는 시위행진에 대하여 무자비한 발포를 감행했다고 하나 데모대의 투석, 경찰관 구타, 치상, 통의동 파출소 습격과 검거, 문교부 청사 파괴, 경무대 침입 기도 등으로 경찰은 부득이 발포하게 되었다.
- 자유당의 성명 (1960.4.20.); 이형, 《조병옥과 이기붕: 제1공화국 정치사의 재조명》, p.304 에 인용됨.
- 미완의 혁명이라 불리는 1960년의 4월민주항쟁도 마찬가지였다. ‘부정선거 다시 하라!’를 목표로 출발한 학생시위는 이승만의 퇴진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학생들과 시민들이 흘린 피의 수혜자가 된 민주당 정권은 혁명의 계승자이기보다는 이승만 정권 수립 당시 권력의 배분에서 배제된, 어떤 의미에서 자유당 정권보다 더 보수적인 집단이었다. 그래도 제2공화국 시절에 존재했던 개혁의 열망과 가능성은 5ㆍ16 군사쿠데타로 짓밟혀버렸다.
- 한홍구, 단 한번도 왕의 목을 치지 못한…, 2001년 02월 14일